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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

유대용

"청주를 알고 지역 정서를 알아야만 예술가"

소        개 청주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국악인
활동분야 국악
활동지역 충북 청주, 전국
주요활동 대학 및 대학원 강의, 저술 및 기획
해시태그 #국악 #배워서남주자 #청주아리랑 #국악인 #유대용
인물소개

청주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국악인, 유대용


청주를 알고 지역 정서를 말할 수 있어야 문화를 아는 예술가라고 할 수 있죠.”

 

충북 음성군 삼성면에서 태어난 유대용 교수는 중학생 시절 일가가 청주로 옮겨오면서 청주에 터를 잡았다. 언제나 흥이 넘치는 그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국악이론을 세워가고 있는 청주의 국악인이다. 흥이 나면 언제나 추임새를 넣을 수 있고, 누구나 귀명창이 될 것만 같은, 탁 트인 마당에서 뿌리를 다져온 국악인 유대용 교수. 그는 한 마디 노랫가락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근원을 연구하고 이론으로 정리하는 가운데 청주라는 지역성을 살려낼 수 있다고 믿는다.

 

아버님이 한학을 하셔서 일찍이 한자를 공부하고 고전을 공부하는 것이 바탕이 되었어요. 중학교에 진학하려고 청주로 나오기 전 잠깐 동안 음성에 있는 망월사라는 절에 있을 때도 불경부터 여러 가지 고전 공부를 한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아요.”

 

그는 그 누구보다 흥이 많은 소년이었다고 한다. 깊은 학문의 경지는 아니었지만 고전을 공부하면서 갖춰진 기본기에 흥을 더하면서 그는 고등학교 시절 맨몸으로 국악의 길로 들어섰다. 어느 해인가 소금 소리에 빠져든 그는 보이스카우트 충북회장까지 역임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던 성격을 발판 삼아 마당극을 기획하고 공연하며 장인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런 끼와 흥은 외할아버지를 닮았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아버지, 어머니께 없는 흥을 물려받았을까 했더니 외할아버지가 서커스단의 단장을 했다더군요. 대학에 들어갈 때는 등록금을 안 대준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청주사대 상업교육과(지금의 서원대학교 무역학과)에 진학했지만요. 사정상 상업교육과를 가긴 했지만 상과대학에서 지금 청주를 대표하는 장인들을 다 만났어요. 김준모, 라장흠 같은 사람들이 동기나 선배로 있었거든요. 공부보다는 그들과 함께 어우러져 공연하고 다녔으니까요.”

 

그는 타고난 끼와 흥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르신들이 대부분이었던 청주 국악판에 장차 젊은 물을 공급할 재목들이 상과대학이라는 불모지 같은 곳에서 싹 트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졸업 후 청주국악협회에 들어가게 되었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공연들을 직접 만들어냈다. 끼와 흥이 넘치던 그에게 이 모든 일들은 모두 필연일 수밖에 없었다.

 


노랫가락에 깃든 이론을 먼저 살피고 연구의 길로 들어서다

 

그의 삶에 전환점이 된 것은 2003년 청주방송에서 기획한 국악 프로그램에 PD로 영입된 때이다. 그동안 수많은 마당극과 공연들을 기획하고 운영해 온 솜씨를 알아본 방송사에서 국악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판을 벌려줄 사람으로 그를 선택한 것이다. 당시 모두에게 생소했던 국악 프로그램의 사회는 물론 출연자 섭외와 정산까지 도맡아서 했고, 6년이 넘는 기간 동안 꾸려내면서 능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맨몸으로 일궈온 국악 인생에 이론이 부족하다는 자괴감이 들었어요. 내가 부르는 노랫가락에 담긴 이론과 체계를 알아야겠다는 깨달음이 들더군요. 그럴 즈음 청주를 대표하는 조동언 명창으로부터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국악과 교수님을 소개받아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죠. 거기서 흔히 우리가 아는 시조창의 박 안에 노랫가락이 어떻게 심어지고 불리는지 옛날 국악 관련 문헌을 연구하게 되었고, 그저 세습되어 불리며 이렇다 할 이론을 내세우지 못하던 우리 지역 내포제(內浦制)의 체계를 제대로 완성할 수 있게 되었죠.”

 


청주아리랑을 넘어 청주를 대표하는 지역 정체성을 완성하는 책을 엮는 것이 꿈

 

지금에야 청주아리랑이라 특정지어 불리지만 이전에는 타 지역의 아리랑과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장꾼이 하루 걸어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이듯 각 지역을 대표하는 아리랑이 청주에도 있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중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만주에 괴뢰국을 세우고 만주척식회사를 차릴 때 청주, 보은 등 여러 지역에서 옮겨간 사람들이 내포제로 대표되는 아리랑을 만들어 불렀는데, 그것이 이제는 청주아리랑으로 불리며 뮤지컬로 재창조되기도 하고 트로트 버전으로도 기획되고 있다. 바로 그 배경에 유대용이라는 공연기획자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한대수 시장님 계실 때 신문사 기자와 방송국 사람들, 그리고 충북대학교 한동철 교수님과 여러 국악인들이 연변 정암촌에 가서 판을 벌리고 그들의 노래를 채록하고 악보까지 만들었어요. 청주아리랑은 충청도 방언이 그렇듯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냉겨주구하면서 느릿하게 빠져야만 하거든요. 정암촌 사람들이 그렇더라고요.”


낯설고 물설은 곳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삶터를 옮겨와 살 수밖에 없었던 아낙네들이 살아온 모든 이야기를 담은 것이 청주아리랑이기에 지역을 대표하는 방언과 흥으로 불려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아무리 잘 나가는 국악인이어도 소용없고, 이곳만의 가락과 정서로 그야말로 촌스럽게 불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지역에서 마땅히 일어날만한 정체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내포제로 불려왔던 노랫가락을 연구하면서 채록하고 음반으로 제작하였으며, 인간문화재로 만들기도 했는데, 이 모든 것은 그의 탁월한 연구 능력 때문이었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국악대학원 겸임교수가 된 이후로 한시도 빠짐없이 노랫가락에 담긴 이론 체계와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온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청주를 위한 일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해야 할 문화유산의 연구와 기록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청주의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청주아리랑이 정암촌 사람들의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 자연스레 불리어졌듯이 까치네 상여소리같은 우리 지역의 문화자산들을 다시 채록하고 재연하면서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제 아무리 많은 이론과 체계를 만들어도 현장의 진짜 소리는 담아내지 못하는 탁상행정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사진 발행일 제작/출처
이종수 정상민 2019.03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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