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버려지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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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도예
"도자기란 인생의 전부"
소 개 | 불의 심판에 승복하는 도예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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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미술, 도예 |
활동지역 | 충주, 청주 |
주요활동 | 도예, 투각,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사기장 |
해시태그 | #수봉 #투각 #도예 #전통도자 #무형문화재 #엄정 #사기장 #원광전통도예연구소 #파리 #리모쥬_도자박물관 #스페인_비스발디 |
불의 심판에 승복하는 도예가, 收峯 이종성
인천에서 검정고시를 공부하던 열여덟살 소년은 1974년 학원비를 벌려고 도예공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도예가의 길을 걷게 된다.
“재미있었어요. 도자기 국보도 재현해보고 싶었구요.”
그렇게 우연히 시작한 도예가의 길은 긴 연마의 과정이었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은 안동오 선생님의 사사로 경기도 광주에서 8년간 생활이 시작된다.
“옛날엔 한 공방에서 이것저것 같이 하던 시기였죠. 물레, 조각, 투각을 다 혼자 했어요. 경기도 광주에서 거의 완숙기를 맞은 것 같아요. 다 하다가 주변의 시기와 질투도 받았죠. 당시에 분업화했던 것인데 저는 그것을 다 혼자 했으니...”
그 후 용인에서 창업을 하면서 투각에 더 집중을 하게 된다. 지금 시대는 도자의 전 과정을 다 할줄 알아야 하는 시대라며, 자신의 손재주를 겸연쩍어 한다. 그런 겸연쩍은 손재주로 그는 지금 무형문화재 제10호 사기장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현재 그의 작품은 파리 리모쥬 도자박물관과 스페인 비스발디 시립박물관의 한국관에서도 소장하고 있다.
장작가마를 하기위해 충북으로 오다.
수도권에서 장작가마 작업을 할 수 없게 되자 2013년 그는 짐을 쌌다. 땅값이 싸고 한적한 곳을 찾아 무형문화재 제도를 권유해준 청주시문화재단의 안승현 팀장과의 인연으로 충북으로 오게 되었다.
“지금 사는 충주의 엄정으로 옮겨 온지도 13년이 되어가네요 여기에 전통도자를 좋아하는 남자 제자가 둘이 있어요. 대견하고 잘 해요. 도자기는 생활이 어려워 경제적인 각오도 해야 해요. 어렵죠. 우리나라는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과 투자가 적어요. 아직도 눈을 못 떴어요. 기업들도 돈벌이에나 투자를 하지 국내작가 특히 전통예술품은 많이 홀대 받는 편이죠.”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낸다.
“투각은 10개를 작업하면 정작 두 세 개가 나오기 어려워요. 장작가마에서는 더 어렵죠. 그러니 단가는 비싸질 수밖에 없어요. 타이틀은 거품가격이 되죠. 나중에 여유가 되면 내 작품들 중 괜찮은 작품을 모아 미술관을 하나 남기는 것이 꿈이예요.”
투각만 20년, 불의 심판
특히, 그가 작업하는 이중투각은 난이도가 높고 어려워 시간과 인내도 많이 필요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작업을 쉽게 하면 성에 차지 않고, 혼이 들어가야 작품의 수준이 달라진단다.
“대충하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어요. 지금도 작업하면서 아쉬움이 돌고 여태 잘 됐다 싶은 것은 한 두 개쯤 있을까 만족한 적이 없어요. 잘 못나온 것은 깨뜨려 버릴 때 마음이 아파요. 하지만 다음엔 이런 일 없어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며 깨뜨려 버리죠.”
도자기에 혼을 담고 그렇지 못하면 깨뜨린다는 것. 도자기 장인의 면모가 물씬 풍긴다.
“도자기는 불의 조화예요. 900도에서 첫 심판을 받고 1300도를 거쳐 두 번째 심판을 받아야 결과물을 얻어요. 불의 심판이죠.“ 불의 심판이라는 대목에서 그의 순한 얼굴에 비장함이 엿보인다.
그러면서 무형 문화재라는 타이틀이 거품일 수 있다고 한다. 작품을 마음대로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흠이 조금이라도 있는 작품은 내어 줄수가 없다. 후대에 좋은 평을 받기위해 양심과 자존심을 팔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무형문화제 제10호 사기장의 책임감이 느껴진다.
그에게 도자기란 인생의 전부
그런 그에게 도자기는 인생의 전부이다. 같은 도자기 하는 사람들고 갖고 싶어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그는 진정한 철학이 있는 장인이라는 생각이다.
“과거에는 도자기가 학문적으로 정립이 안되어 문헌도 없어 배우기도 어려웠어요. 당시 대학교수층도 이론의 깊이가 두텁지 않았죠. 작업도 분업화 되었던 시기라 도자기의 정의도 정양모 등의 책에 의존해 안 것이고, 눈썰미만 갖고 하는 것에 한계가 있어 저는 조각, 물레, 그림(사군자)까지 다 따로 배워야 했어요. 게다가 전통 도자기이다보니 간송미술관에 가서 보며 공부하고, 세밀한 중국도자기도 공부한다고 했는데 40대 때는 눈도 노안이 와서 어려움이 많았죠.”
40대까지 공부해 왔다는 그의 말에 공연히 마음이 숙연해 진다.
지원금보다 작품구매가 더 중요
정직하고 솔직하게 자존심을 걸고 만들어야 후에 좋은 평가를 받는다고 생각한다는 그는 맑은 백자같은 미소를 가졌다. 그간 경기도에서 도예촌을 추진하다 겪은 갈등이나 해외전시회를 둘러싼 갈등이 그를 괴롭혔다면서도 맑은 미소를 잃지 않은 모습에 외유내강한 그의 성품이 엿보인다.
“백자를 만드는 원토가 부족한 것이 걱정이예요. 채굴이나 광물허가 받기도 쉽지 않고, 환경에 저해되지 않는 조건을 맞추기가 어려워요. 좋은 흙을 쓸 수 있게 관리가 되면 좋겠어요. 중국은 경력과 능력이 높은 작가에게 좋은 흙을 확보해 제공하며 관리를 잘 하고 있어요. 국가에서 무형문화재만 지정해 돈을 지원하기보다 작가의 작품을 납품 받아주면 작가의 작업에 큰 도움이 되고 도자기 발전의 지속성도 있을 것 같아요.”라고 힘주어 말한다.
글 | 사진 | 발행일 | 제작/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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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 | 염종현 | 2016.12 |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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