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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시

배병무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는 시를 쓰고파”

소        개 맛있는 과일을 아는 시인
활동분야 문학, 시
활동지역 청주
주요활동 엽서시동인
해시태그 #다코베야 #시 #충북작가회의 #시인 #배병무
인물소개

맛있는 과일을 아는 시인, 배병무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는 시를 쓰고파

 

며칠 전에 여기서 과일 사갔는데 너무 맛있다고 해서 왔어요.”

 

옥산에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신흥슈퍼를 지키는 배병무 시인이 할머니 손님을 받는다. 갓 나온 귤이며 홍시에 바나나까지 할머니의 말대로 맛있어 보인다. 김장철이 가까워오는 10월 중순이라 열무며 배추 등속이 슈퍼 앞을 꽉 채우고 있는데, 무엇보다 과일 고르는 걸 잘 하는 시인의 솜씨 덕분에 장사가 꽤 잘 된다. 겉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과일 장사, 채소 장사이지만 그는 어엿한 시인이다. 2007년 첫 시집 구름의 뿌리(고두미)를 펴낸 후 시 쓰는 일을 쉬고 있지만 한 번도 시를 잊은 적이 없다.

 

아침 일찍 야채시장에 나가서 물건 해주고 배달 나가고 밤 10시에 가게 문 닫고 정리하고 나면 시 한 줄 쓸 시간이 없어요. 핸드폰 메모장에 써놓긴 하는데 정리할 시간이 있어야지요.”

거짓말 한 마디 보태지 않아도 그의 말은 절박해 보인다. 누군가는 번갯불에 콩 구워먹는다고, 잠깐 시간을 내어서라도 써야지, 구차한 변명이라고 하겠지만 삶의 현장에서 눈코 뜰 새 없는 그의 말은 빼곡하게 적혀있는 시 메모들처럼 절박하다. 슈퍼를 한 시도 비우지 않는 그의 아내는 휴일도 없다고 한다. 아들이 훈련소에서 퇴소할 때 한 번, 명절날 하루 쉰 것을 빼고는 연중무휴로 일할 만큼 바쁘니 시를 쓸 시간이 없는 게 당연해 보인다.  

 


남한강이 낳은 시인

 

그는 충주댐 건설로 물에 잠긴 남한강이 낳은 몇 안 되는 시인 중 하나다. 1992, 청주대학교 국문과 3학년 재학 중에 한반도의 젊은 시인들’ 2서로 일으키는 땅」』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고, 충북문화운동협의회 시절을 함께했다. ‘엽서시 동인과 충북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열심히 시를 썼다.

 

처음에는 운동을 했어요. 중학교 시절 사이클 선수로 활동하다가 고등학교에 올라와 권투를 시작했어요. 전국체전 대표로 나가서 시합도 했어요. 그때는 진짜 세계 챔피언을 꿈꿀 정도로 권투만 생각했어요. 주먹이 고장나기 전까지는요.”

 

그의 시에는 물에 잠긴 고향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고기 잡는 이야기며 물에 잠겨가는 마을, 오랜 가뭄 끝에 드러난 마을 터 이야기들이 전설처럼 쏟아져 나온다. 그가 운동을 했다는 이야기가 믿기지 않을 정도다. 뜨거운 여름 아스팔트 도로를 달리며 쏟았던 땀이며 가난한 집안을 일으키고자 세계 챔피언을 꿈꾸었을 링 위의 시인을 떠올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가진 운동 선수였고, 경기 중 주먹 뼈가 어그러지면서 시인의 길로 접어든 특이한 이력을 가졌다.

 

 

시를 쓰고 싶었다

 

갑자기 시가 쓰고 싶어졌어요. 국문과를 가면 시 쓰는 법을 배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막상 와보니 그렇지만은 않더라고요.”

 

청주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한 후 문학동아리에 들고서야 시는 스스로 배우는 것임을 깨달았다. 스스로 무식한 운동 선수였다고는 하지만 남한강이 키운 시심은 그의 가슴 속에 가득했다. 그러나 학창시절부터 시를 가까이했던 동료들은 그를 무시하기도 했다고.

 

시를 처음 써간 날 동기 한 명이 내 시는 시도 아니라며 찢어버린 뒤에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도서관에 틀어박혀 시집과 평론집을 닥치는 대로 읽었죠.”

 

보통 사람 같았으면 다시는 시 같은 것은 쓰지 않으리라 여겼겠지만 그는 그 뒤로 폭풍처럼 시를 읽으며 자신 안에 남한강 줄기처럼 유유한 시가 들어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대학생이 되고나서 현실과 역사에 눈뜨고 나서 자신이 변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나만의 시 세계를 찾다

 

다코베야 연작을 쓰면서 시를 다시 보게 되었어요. 지금처럼 위안부 문제가 거론되기 전에 신문 기사에 난 사할린 동포들의 이야기를 듣고 연작으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는 그런 시를 쓰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걸 써놓고 군대에 다녀오고 나니 많은 게 변해있었죠.”

 

대학 재학 중에 문화운동협의회와 충북민예총 소속 문학위원회, 민족문학작가회의 활동을 할 만큼 열정적이었던 시절이다. 다코베야 연작을 쓰고 난 뒤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이른바 다코베야 시인으로 불릴 만큼 주변에 많이 알려져 있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을 생생하게 표현한 시와 가리가치토게의 철길을 놓았던 사할린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시가 그의 시 정신과 함께 문학을 하던 선후배들을 감동시켰던 것이다.

 

성욕의 벌판이었던/ , 숨어버린/ 신의 그림자만 보일 뿐/ 그 침묵의 나라에서/ 찢어진 옷 하나 찾을 수 없는/ 조선의 하늘 고개 아리랑/ 아리랑 넘어간다 <아리랑>”

그는 그렇게 독보적인 시 세계를 정립해갔다.

그런 작품들을 모아 그는 2007년에야 첫 시집을 묶었다. 죽기 전에 시집 한번 내보자며 주위의 도움을 받아 펴낸 시집에는 다코베야 연작과 아울러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는 듯한 시들도 엮여있다.

맛있는 과일도 그래요. 스스로 희생해서 다른 과일들을 맛있게 만드는 한두 개의 과일이 있어요.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이렇게 슈퍼를 하면서 만나는 옥산 사람들, 특히 할아버지, 할머니 댁까지 배달을 하고 나면 그 분들의 삶에서 많은 걸 얻게 됩니다. 상처받은 영혼들을 보게 되지요. 시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또 한 권의 시집을 그리다

 

그는 한 권으로 족하다던 시집을 또 한 번 엮고 싶다. 시가 쓰고 싶다는 말에 아무 말 없이 빙그레 웃기만 하는 아내를 보며 시 쓰기를 그만두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천생 시를 써야 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 일찍이 결혼한 탓에 성인이 된 딸과 아들이 둔 그는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이 우선이라고는 하지만 과일과 채소를 고르듯 시를 쓰는 일을 포기한 적이 없다.

사진 발행일 제작/출처
이종수 정상민 2019.03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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