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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바이올린

임영주

“청주에서 앙상블을 활성화시키고 싶어요”

소        개 아름다운 바이올리니스트
활동분야 음악, 바이올린
활동지역 충북 청주
주요활동 음악, 바이올리니스트, 예화
해시태그 #임영주 #바이올리니스트 #예화 #이화여대 #파소
인물소개

 

옷걸이와 30㎝ 자로 연주 흉내를 내던 바이올린 소녀

“청주에서 앙상블을 활성화시키고 싶어요”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고 아버지는 조소를 전공했다. 가정환경 덕에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음악을 들었으며 태어나서는 음악회에 자주 갔다. TV 프로그램도 음악 관련 방송을 즐겨 봤다. 보통은 기억도 나지 않을 시절인 5살 때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 씨의 연주를 듣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 연주 중 흔들리던 강 씨의 뱅헤어가 지금까지 머릿속에 담겨있을 정도다. 엄마의 드레스를 입고 바이올린 대신 옷걸이를, 30㎝ 자를 활 삼아 연주 흉내를 내던 소녀가 지금은 어엿한 바이올리니스트로 성장했다. 지역의 음악 그룹 ‘소리 창조 예화’의 단원 임영주 씨다.

 

“집에서는 음악하면 고생하게 됨을 아시니까 반대하셨죠. 그래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어요. 어머니는 얼마나 졸라대나 보겠다고 하시다가 결국 포기하셨어요. 할머니가 초등학교 입학 선물로 바이올린을 사주셨습니다. 그 전에 제가 하도 어머니한테 바이올린을 사달라고 조르니까 할머니가 ‘그 바이롱인가 뭔가 좀 사주지 그러냐’ 하시다가 당신께서 선물로 주시더군요.”

 

부산예고 3학년 때 IMF가 터지는 바람에 이화여대 음대에 들어갈 때 첫 학기 입학금만 집에서 대주고 그 다음부터는 레슨·공부 등 과외와 예배 연주, 결혼식 연주 오부리, 오케스트라 객원 등 닥치는 대로 뛰었다. 설상가상 교직 실습 중이던 4학년 때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그 날이 하필이면 만우절이었어요. 거짓말 같은 일이었죠. 집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았는데도 IMF 사태가 일어나기 전엔 저는 부산에 몇 안 되는 사립 고등학교에 다니는 게 당연한 줄 알았어요.”

 

이대 대학원에 다닐 때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음악을 계속 하고 싶지만 몸이 불편한 모친의 상황 등을 생각하니 옆에 누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결혼을 빨리 하게 됐단다. 2003년 대학원을 졸업하고 떠난 미국 유학에선 시작부터 아찔한 경험을 했다. 당시 아이 둘에 어머니까지 함께 갔는데 현지 대학 합격통지서의 원본이 바뀌어서 출입국관리소에 서너 시간 잡혀있었다. 이민가방 8개도 더불어서. 다행히 합격한 사람이 맞음을 핫라인으로 확인한 후 풀려날 수 있었다.

 

 

 

“지방대 음대 사라지는 등의 현실 안타깝다”


박사 학위를 받고 2014년 졸업 후 귀국한 그는 그 해 7월 세종문화회관에서 귀국 독주회를 연 이후 각종 앙상블 등 활동을 열심히 했다. 하지만 고국에서 음악인으로서의 삶이 그리 녹록지는 않았다.

 

“저는 박사까지 했으면 최소 지방대에서 교편을 잡을 줄 알았는데 교육 경력 2년이 없으면 안 되더라고요. 그렇게 계속 연주 경력을 쌓으면서 서초동에 연습실을 마련했어요. 그런데 제 시댁이 연희동에 있는데 2002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하우스 콘서트를 연 박창수 THE HOUSE CONCERT 대표가 시댁 옆집에 살고 계시지 뭐예요. 그래서 박 대표님에게 이력서를 드리고 그 후부터 앙상블·협연 등 연주가 많이 들어왔어요.”

 

연주 활동을 하면서 교원 모집 공고가 나면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냈다. 그런데 임 씨의 말로는 이미 내정자가 있는 상황에서 구색을 맞추려고 공고를 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내가 이런 데 들러리나 서려고 왔나’ 하며 실망하던 차에 2016년 9월 이대 대학원 학부에서 관현악법 등을 가르치는 시간강사를 맡게 됐다. 거기서부터 인연이 돼 2017년 3월부터 청주교육대에서 기악 실기도 가르치게 됐다. 청주에 자리를 잡은 때는 2016년 1월. 그 해 예화의 전옥주 대표가 활동을 같이 하자고 하면서 5월부터 예화의 단원이 돼 연주를 하고 있다. 임 씨에게 음악적으로 청주는 어떤 곳일지 궁금했다.

 

“청주에서 앙상블을 활성화시키고 싶은데 연주자 모으기가 쉽지 않아요. 여기서 잘 하는 사람은 대부분 서울에 가고, 그래서 활동 기반이 서울이 되는 이상한 경우예요. 교통이 좋다는 점도 한 몫 거들죠. 그리고 지방대 음대가 거의 없어져서 당연히 서울로 가게 되기도 하니까 기반도 인프라도 없게 됩니다. 제 어머니도 당시에 KTX가 있었으면 부산예고가 아니라 서울예고로 보내셨을 거예요. 그런 부분이 아쉽지만 청주에서 좋은 연주를 많이 들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저 역시 힘들게 음악을 했기 때문에 멘토 역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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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홍균 이재복 2016.12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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