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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한상주

“‘밴드’ 하면 한상주, ‘로우테잎’ 하면 한상주가 되고 싶어요”

소        개 청주를 대표하는 뮤지션
활동분야 음악
활동지역 청주, 대전, 서울
주요활동 공연, 앨범 발매, 작품 활동
해시태그 #밴드 #로우테잎 #뮤지션 #한상주
인물소개

청주를 대표하는 뮤지션 한상주

“‘밴드하면 한상주, ‘로우테잎하면 한상주가 되고 싶어요.”

 

 
나의 우상, 아버지

흔히 음악을 하거나 예술을 하는 사람들 중 아버지를 우상으로 꼽는 사람은 드물다
. 대부분 부모의 반대에 부딪히는 예술인의 현실 때문일까. 그러나 밴드 로우테잎의 한상주는 기꺼이 아버지를 그의 음악적인 멘토이자 우상으로 꼽는다.

고등학교 때 교회에서 음악을 시작했는데 아버지가 기타를 사주셨어요. 아버지는 그룹사운드를 하셨거든요. 6, 70년대를 풍미했던 벤처스 악단의 파이프라인같은 노래들을 들려주셨을 때 그게 멋있어서 아버지처럼 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버지가 예전에 검지손가락을 다치셨었어요. 기타리스트에게는 치명적이었죠. 그런데 그걸 극복하고 피아노로 전향을 하셨어요. 그게 저에겐 큰 충격이었어요. 군대 전역하고 기타도 없을 때 아버지께서 기타도 사 주시고 많이 지원해주셨어요.”

 

그는 아버지 덕분에 지금 이 자리에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더 밀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씀하신다고 한다.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하루에 10시간가량 연습을 하면서 세계 최고의 기타리스트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고. 그는 현재 함께 음악을 하던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해 공연을 하는 어엿한 뮤지션으로 성장했다.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자가 목표였어요. 부모님께서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지원을 해주셨으니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드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음악과 관련된 일을 찾았는데, 2006MBC에 오디오맨을 구하더라고요. 마이크도 채워주고 조명도 들어주는 업무였어요. 그 일을 하면서 스윗게릴라즈라는 펑크록을 하는 밴드 활동도 했었어요. 서울, 대전, 광주, 부산까지 불러주기만 하면 가서 공연을 했죠. 그러던 중 GMC레코드에서 연락이 와서 공연을 하고 2007년에는 쌈지사운드페스티벌에 나가기도 했어요.”

그는 록 밴드 스키조의 연락을 받고 EP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그의 정식 데뷔앨범이었다. 이를 발판으로 2008년 쌈지사운드페스티벌에서 본선 통과라는 쾌거를 이뤘다. 당시 함께 경합했던 팀들을 보면 놀라운 결과였다. ‘장기하와 얼굴들’, ‘브로큰 발렌타인등 쟁쟁한 팀들이었다. 안타깝게도 최종예선에서는 고배를 마셨지만 공연 활동을 더 열심히 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는 또한 EBS 스페이스 공감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헬로루키에 선정되었고, 문화체육부장관상까지 받게 되었다. 그 날은 역사적인 날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변화의 시기가 찾아왔다. 2009, 열심히 공연 활동을 하며 팬이 많이 생길 무렵 회의감이 찾아왔다. 같은 직장, 같은 음악, 같은 밴드에서의 생활에 쳇바퀴 도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고, 그는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무작정 떠난 일본 유학

 

음악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테크닉 쪽으로는 일본이 발전되어 있고 시장이 훨씬 크거든요.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욕심을 많이 부렸던 것 같아요. 동경예술대학교에 입학하려고 EJU라는 유학시험을 계속 공부했어요. 돈을 벌면서 공부해야 했기에 무리를 했어요. 다니던 직장을 포기하고 간 거니까 어떻게 보면 미친 짓이었죠. 한 달에 학비가 5만 엔 정도 들었으니까 힘든 상황이었어요.”

 

시급 천 엔을 받고 밤 10시부터 아침 8시까지 일을 해야 했다. 오전 9시부터 학교 수업이 있었기 때문에 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학교로 갔고, 1시까지 수업을 받은 후 집으로 와서 쪽잠만 자고 다시 공부를 해야 하는, 그야말로 숨막히는 일상이었다. 게다가 비싼 집세와 교통비까지 나날이 가중되는 경제난에 정신적인 스트레스까지 겹쳐서 최악의 유학생활을 보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11년에 후쿠시마 지진이 일어나면서 그의 삶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결국 그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몸과 마음이 황폐해진 상태였다. 나이 서른이 되어 다시 집에 손을 벌리게 된 상황에 기가 막혔다.

 

 
좌절을 딛고 일어서다

그래서 실용음악학원에서 일을 하게 됐어요. 제일 잘하는 게 기타 치는 거니까요. 마침 오디션 프로그램 붐이 일어 돈을 다시 벌게 되었죠. 그때 다시 결성한 밴드가 그래비티였어요. 전에 같이 보컬을 하던 형은 위대한 탄생이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서 이름을 알렸고 다른 멤버들은 레코딩 엔지니어가 되기도 했죠. 그렇게 새로 밴드를 만들어서 첫 번째 정식 앨범을 내게 되었죠.”

현재 밴드 로우테잎으로 정착한 그는 벌써 30대 중반이 되었다. 유학 시절의 뼈아픈 실패를 딛고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안정적인 음악 활동을 하게 된 것은 천운이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음악가 한상주로서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시기였다고.. 굴곡 많은 인생과 해체와 결성을 거듭한 밴드를 생각하며 울기도 많이 울었다.

 

예전에는 정말 잘 되어서 메이저로 올라가는 게 꿈이었지만 지금은 욕심을 한 점 한 점 덜어내는 때인 것 같아요. ‘로우테잎이라는 밴드 이름이 그래요. 테이프의 마지막 끝을 로우테잎이라고 불러요. 제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그런 만큼 우리 밴드의 음악을 더 많이 알리고 싶고, 욕심을 조금 부려서 청주를 대표하는 뮤지션이 되고 싶어요.”

한 걸음 한 걸음 지난 삶의 여정을 딛고 그는 청주를 대표하는 뮤지션을 꿈꾸고 있다.

 


다시금 뮤지션을 꿈꾸며

지난해
8월 그는 정기적으로 기부하고 있는 에티오피아의 케네사라는 친구한테 써주었던 노래를 앨범으로 발매했다. 이어 10월에는 워터폴이라는 앨범을 내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충북MBC에서 크리에이터로서 콘텐츠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고, 청주KBS에서는 양문석의 라디오스타라는 프로그램에서 패널로 노래도 하고 있다. 그의 꿈대로 어엿한 뮤지션으로 우뚝 서기 위한 활발한 활동들을 하고 있다.

 

청주를 대표하는 뮤지션이 되고 싶어요. 후배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도록 꾸준히 활동하면서 밴드하면 한상주, ‘로우테잎하면 한상주를 떠올릴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더 큰 목표는 해외투어도 하고 싶고요. 이도저도 아닌 삶을 살아온 삼십 대 중반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애매모호한 삶을 사는 사람도 꾸준하게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어요. 제 인생에 영향을 준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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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발행일 제작/출처
이종수 정상민 2019.03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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