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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성악가

장관석

‘소리는 내는 것이 아니라 울리는 거다.’

소        개 음악인
활동분야 오페라 성악가
활동지역 청주, 전국
주요활동 무대공연, 교육
해시태그 # #청주오페라 #불교합창단 #
인물소개


지역에서 크고 작은 예술행사에 가장 자주 얼굴을 보이는 성악가이다
.

수많은 무대공연을 통해 사람들을 감성을 채워주는 최고의 남성 아리아로 서슴없이 장관석 성악가를 꼽는다. 우리 지역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 악기들이 많지만, 사람의 음성처럼 정서를 충만하게 적시는 악기도 없다. 성악가들은 몸이 악기다. 장관석 성악가는 타고난 성대와 음악성, 소리를 잘 발현할 수 있는 몸까지 갖추었다.

 

부친께서 공무원이셨다. 군청예술과에 근무하셨던 부친을 따라 다니며 어느 자리건 시키는 대로 노래를 했다. 칭찬 듣는 게 좋아서 용돈 얻는 게 좋아 노래를 했으나, 로봇을 좋아하는 소년 장관석은 과학자가 되는 게 꿈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예능 쪽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림을 잘 그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예능인으로 사는 걸 반대하셨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 도움으로 방향전환을 했다.

 

노레의 꿈을 따라 고국을 떠나다

 

청주사범대학 음악교육과를 졸업한 후, 노래가 좋아 학교 교사의 길 보다는 성악을 택했다. 노래에 꿈과 인생을 실었다. 대전시립합창단에서 잠시 활동하다가 홀연히 유학길에 올랐다. 24세 어린 나이에 이태리 움부리아주 빼루지아언어학교에 입학해서 언어를 배우며 중간중간 레슨 받으며 꿈을 키웠다. 언어의 장벽으로 수업이 너무 어려워 사전을 들고 다녔다. 어순이 달라 그저 열심히 달달 외웠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순간 사전을 놓게 되고 단어가 익숙해졌다. 열심히 살았을 뿐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고등음악원이라 할 수 있는 부르노마데르나 국립음악원에 합격했다. 졸업 후에 평생 잊을 수 없는 스승을 만났다. ‘조르죠 따데오그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 그분을 통해 성악가의 단단한 초석을 닦았다. 이후 바리톤의 거장 삐에로 까푸칠리’ ‘알도 프로티두 분 스승을 만나 노래를 배웠다. 1995국제성악콩쿨인 빈첸초 노스토르 콩쿨에서 2위로 입상했다. 국제무대에서 받은 첫 상이라 그만큼 감격이 컸다.

 

선택의 기로岐路에서

 

살면서 몇 번 정도 중대한 선택을 해야 할 기로岐路에 선다. 집에서 보내오는 돈이 떨어지는 순간에 깊은 고민을 하게 됐다. 이미 결혼을 하여 아들이 있었다. 그때 이태리 남부에서 오페라 무대에 설 기회가 왔다. 귀국한다 해도 앞날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라 그곳에 정착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하지만 아내를 들여보내고 혼자 남아 있기는 어려웠다. 두집 살림을 해야 할 형편이었다.

 

조르죠 따데오이태리 선생님께 3년 반 동안 레슨을 받고 있었는데, 귀국 결정을 하고 돈이 떨어져 몇 달 동안 레슨을 못 가고 있었다. 마침 한국에서 온 지인의 도움을 받아 100불을 가지고 선생님께 갔다. 선생님이 독일 에이전시를 소개해 주셨는데 6개월을 기다리라고 했다. 그도 여의치 않았다. 선생님께서는 레슨비를 도로 내주셨다. “이 시간은 너를 위해 할애해 줄 테니 그냥 와라.” 하시면서 4개월 동안 무료로 가르쳐 주셨다. 지금도 그 선생님 은혜를 간직하고 있다.

 

나를 아프게 한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1996년 고국으로 돌아와 피가로의 결혼으로 데뷔하여 서울에서 바쁘게 살았다. 매년 10여 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했다. 이태리에서 수상한 것이 지면에 알려지면서 무대에 선 것이 수백 회를 넘는다. 그런데 몸이 부서지게 노래를 하기는 하는데 성악가에게 돈을 안 주는 거다. 2천만 원 정도 받지 못했다. 공연주최주관자들이 자신들의 몫만 챙겼다.

 

경제가 어려워 서울 생활이 어려워졌다. 힘든 상황에 지친 몸과 마음을 술로 달래다 보니 목소리를 잃었다. 절망과 좌절로 8개월 동안 라면만 먹으며 모든 걸 포기하려고 했다. 그때 어머니가 3백만 원 주시면서 이탈리아에 다녀오라고 하셨다. 조르죠 따데오 스승을 찾아갔다. 다시 발성 연습하여 잃었던 소리를 찾았다.

 

정말 절망적이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핑계로 함부로 살았던 나의 문제였음을 깨닫고 귀국 후 세배 네 배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고향으로 가자. 고향으로 내려와 따뜻한 고향 분들과 함께하는 거다. 고향은 그를 반겼다. 보은 출생인 장관석 성악가는 청주중학교와 신흥고등학교를 나왔다. 1997년부터 서원대학교 외래교수로 나갔다. 요청이 있을 때마다 일에 미쳐 뛰었다. 충북예고에 출강도 했다. 청주오페라단 단장을 하면서 무대에 설 때마다 초심의 자세를 잃지 않으려 자세를 가다듬으며 섰다. 그러던 중 2008년도에 스승이 떠나셨다는 비보를 들었다. 정신적 지주셨던 스승님 비보를 생각하면 지금도 먹먹해진다.

 

구름 속에 계신 스승님

 

득음이라는 걸 경험했다.

어느 날 자신의 음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다. 다시 절망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때 꿈속에 이태리 스승님이 나타나셨다. 한없이 슬픈 마음으로 스승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스승님이 말씀하셨다. ‘더 이상 걱정하지마! 이제 부터는 네가 원하는 대로 소리가 날 거다.’ 하시는 거다. 꿈에서 깨어 베란다로 나가니 구름 속에 스승님이 웃고 계셨다.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그 후부터는 원하는 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이 없어졌다.

 

발성의 길이 확실히 섰다. 정확한 모드가 있어서 그대로 가르치니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된다. 나보다 나은 제자 배출을 목표로,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발성체계를 정리하여 가르치고 있다. 내가 그분께 받은 것을 제자들에게 주고자 노력한다. ‘소리는 내는 것이 아니라 울리는 거다.’ 라고 소리의 길에 대해 제자들에게 항상 강조한다. 소극장을 만들어 연속적인 오페라를 만드는 것이 꿈이다. 오페라가 소수만의 음악이 아닌 객석과 가까이 다가가서 쉽게 이해하는 오페라를 만들고 싶다.

 

트로트가 대세인데 지나친 편중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관중이 없는 건 슬픈 일이다. 클래식 음악이 기우는 이유는 복잡하지만, 음악인들 책임도 크다. 여러 문제 중 하나가 제자 양성을 하지 않은 것이다. 무대에 한 번 서면 수백만 원씩 받던 시절에 본인들만 혼자 갔다. 제자들과 함께 갔어야 했다. 클래식이 몇 사람들만의 공유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란다. 오페라는 보물이다. 클래식을 찾는 사람들이 성악가를 찾는 시기가 다시 올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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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미옥 유현덕 2021.01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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