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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농악, 전통

방대원

"청주농악은 요란스럽지 않고 잔잔하면서도 빨라요. 그러면서도 끊기는 것 없이 흥이 나죠"

소        개 충북의 민속음악을 지키고 보존발전시키는 전문 국악인
활동분야 청주농악, 전통
활동지역 충북, 청주, 전국
주요활동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호 ‘청주농악’ 상모 전수조교
해시태그 #청주농악보존회 #상모 #버꾸 #청주농악 #방대원
인물소개

청주농악을 지키는 국악인, 방대원

청주농악은 요란스럽지 않고 잔잔하면서도 빨라요. 그러면서도 끊기는 것 없이 흥이 나요.”

 

7월 백중놀이면 느티나무 아래 농악대가 대열을 짓고 풍물을 치고 씨름대회가 열렸다. 가까운 마을의 내로라하는 장사들은 다 모여 자웅을 겨루며 한 해 농사 절반이 지나가는 칠월 더위를 잊었다. 여기에 흥과 힘을 불어넣는 것은 풍물이었다.

 

열다섯 살 때 농악을 했어요. 괴산군 청천면 여사왕리라고 80가구 살았었나? 그쪽에 젊은 사람이 많았는데 다들 농악을 좋아했어요. 아버님도 장구를 잘 치고 쇠를 잘 쳤어요. 그리고 괴산군 문광면 문법리에는 유명한 상쇠어른이 계셨어요. 혼자 사는 분이셨는데 우리 동네에서 땅도 주고 하면서 모셔왔어요. 그 양반 이름이 이용구인데 그 뒤부터 이름이 난 거죠. 괴산에서 1등 하고 미원에서도 1등 하고, 칠성에서도 1등 하고. 키가 조그마하고 개미허리인 양반한테 많이 배웠죠. 아무튼 농악대가 가는 데마다 1등을 했어요. 나중에는 한 40명이 몰려다니면서 상을 휩쓰니까 동네 거덜난다고 난리가 날 정도였죠. 그때만 해도 1등이면 송아지 한 마리를 주었으니까요. 저도 신동으로 각광을 받고 이름을 날렸죠. 그러다가 박정희 시절 새마을운동이 열리면서 각처에 농악이 없어졌어요. 시끄럽게 두드린다고 다 불살라버렸어요. 그 길로 생계를 위해서 청주로 이사를 왔어요.”

모든 농악이 상쇠와 상버꾸가 7, 80점 따고 들어간다는 말이 맞았다. 상쇠가 앞에서 이끌면서 무용도 하며 잘 놀면 농악의 꽃이라 불리는 상버꾸쟁이와 꼬리버꾸쟁이까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게 된다.

그러나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길게 이어질 줄 알았던 농악 이야기가 새마을운동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신동이라 불렸던 방대원의 인생도 급격하게 전환기를 맞았고 그로 인해 그는 엉겁결에 청주농악의 산 역사가 되었다.

 

무형문화재 이중환 선생과의 만남


“82년일 거예요. 이중환 씨가 하는 농악팀이 무심천 뚝방에서 연습을 하고 있었어요. KBS 음악제에 나가려고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나도 농악 하는 사람이라 그게 보기 좋잖아요. 그래서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나 이거 하면 안 됩니까했지요. 다 노인 양반들이니 젊은 사람이 북을 친다니까 신기했나 봐요. 내가 사물을 다 쳤어요. 그러니까 아유, 젊은 사람이 북을 치면 안 되겠다.’ 하면서 버꾸를 돌리라고 하데요. 그런데 버꾸를 보니까 다 절단 나서 못 쓰겠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버꾸를 만들어서 돌리니까 어른들이 엄청 귀여워했어요.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거죠. 그런 청주농악이 921023일에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이 됐죠. 이중환 선생님도 그 날짜로다가 무형문화재가 되셨고.”

그가 다시 풍물을 친지 10년만의 일이다. 그 뒤로 국악협회 상무이사와 부회장을 맡으며 청주농악을 지켜왔다. 돌이켜 보면 지금은 돌아가신 어른들 따라다니면서 잘 놀았다는 생각뿐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청주농악보존회라는 이름 그대로 원형을 보존해오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관중을 위해서 보기 좋게 콩나물 대가리로 악보를 만들어서 농악을 하는 게 아니죠. 그냥 생긴 대로 옛날에 어른들이 하던 대로 하는 거죠. 다른 사람들은 구닥다리라고 할 수도 있지만요. 내가 농악을 알고 그 깊이를 알다 보니까 청주농악이 확실히 다른 지역과 다른 것을 지켜가고 있더라고요. 이중환 선생님은 절대 다른 데 가서 품은 안 팔았어요. 이 안에서 그 선생님과 어른들이 하던 것을 그대로 전수 받았어요. 그래서 청주농악보존회는 아직까지 지키고 있구나, 이런 자부심을 가지고 있죠.”

 

 

청주농악이란

 

청주농악은 무엇일까. 방대원 선생이 말하는 청주농악은 이렇다.

샛가락이 달라요. 경상도는 뚜벅거리지만 청주농악은 그렇게 요란스럽지도 않고 잔잔하면서도 빨라요. 그러면서도 끊기는 것 없이 흥이 나요. 놀다가 끊기는 게 없어요. 또 상쇠가 쓰는 버꾸가 달라요. 다른 데 버꾸를 보면 타조털인가로 해서 보기 좋잖아요. 그런데 우리 어른들은 버꾸를 뒤통수에다 쓰고 돌리죠. 끝날 때까지 계속하자면 굉장히 힘들어요. 어딜 가든 청주농악은 버꾸가 제일 최고라는 소리를 들었어요.”

 

버꾸는 지역마다 용어가 모두 다르다고 한다. 돌무라거나 돌무까시라고도 한다. 쉽게 말하면 상모다. 종이로 술을 만들어 길게 붙인 버꾸를 뒤통수에 붙이고 돌리는 기술이다 보니 다른 데보다 힘들 수밖에 없다. 한번 놀면 처음부터 끝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지니 누구라도 쫓아 들어가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구수한 멋이 있다. 몇 사람이 쳐도 북적북적하니 멀리서도 발길을 돌려 찾아오게 하는 게 청주농악만의 특색이라고 한다.

 

사물이랑 손이 번개 치듯 하고 고개를 돌리는 걸 옆에서 보면 기가 막혀요. 그런데 먼 데서 들으면 옛날에 하는 쿵짝쿵짝하면서 어깨춤이 나오는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고 후다닥 후다닥 소리가 나요. 옛날엔 강서 쪽 지동 사람들이 많이 했지만 청주시로 통합이 되고 나서는 강서농악으로 부르기도 했죠. 신천농악, 신대농악도 있었다가 청주로 편입이 되면서부터 청주농악이 됐어요.”

 

그는 감히 100년 역사를 안다고 말한다. 열다섯 살 무렵 칠십이 넘은 어른들 밑에서 배웠고 청주로 와서도 사십 나이에 어른들을 만나 놀았으니 100년 역사를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 역사를 말해주는 사진이 열일곱 살 때 사진이 전부라는 것이다. 그러니 새마을운동 이후 동네 망한다고 다 태워버린 농악기들은 어떨까.

 

그래도 청주농악을 지켜온 보람을 인정받았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전주대사습놀이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은 것도 청주농악만의 전통을 지켰기 때문이다.

모두 설장구 치고, 장구통 쥐고서 돌리면서 난리가 났죠. 그런데 그때 심사하시는 분이 얘기하기를, ‘아직도 청주농악은 때가 안 묻었다는 겁니다. 청주농악에서 설장구를 치면 빵점이라고요. 허리가 가느다란 사람이 설장구를 치면 날아다니고 보기에는 좋죠. 그런 거야 배울라치면 금방 배우거든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청주농악은 뻣뻣이 서서 그냥 돌리고 간다고 보겠지만 청주농악은 꽹과리 잔가락이 계속 구수하게 이어지고 판의 끊임이 없고 북은 여기 팔꿈치에 메고 치거든요. 돌무도 뒷버꾸에 쓴다고 해서 거의 바닥과 수직이 될 정도로 쓰는데(다른 지역은 거의 바닥과 약 45도 정도) 그러다 보니 항상 어깨를 타고 돌죠. 버꾸에 단 깃도 종이로 만들어 넓고 길다 보니까 빨리 안 돌아가요. 그런데 지금은 그걸 짧게 하니까 빨리 돌리고 그러죠. 내가 돌리는 거 보면 딱 달라요.”

 


상버꾸쟁이 방대원

옛 어른들은 이렇게 버꾸를 돌리는 것을 진상을 돌린다고 했다. 진득진득하게 돌린다는 청주만의 특성이 드러나는 말이다. 현재 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부분들이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버꾸 벙거지에 꼬리 다는 곳까지 실로 막대기를 만들 때도 다른 지역보다 반 뼘 정도는 더 길게 만들고 꼬리에 달리는 종이도 다른 지역보다 두 배 정도 넓기에 진득진득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청주 지역만의 원형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 국악인 방대원이 있었기에 청주농악은 구경꾼을 즐겁게 해주는 놀이로 남아있다. 단순히 즐기는 공연물이 아닌 고단한 삶을 위로하고 즐거움을 주는 농악의 상버꾸쟁이로서 그는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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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정상민 2019.03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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