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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판소리

서동율

“어제와 다른 오늘의 얼굴… 그게 판소리의 매력”

소        개 전통연희단 마중물 대표
활동분야 음악, 판소리
활동지역 충북 청주
주요활동 판소리, 마중물, 소리풍류
해시태그 #서동율 #판소리 #마중물 #소리풍류
인물소개

“어제와 다른 오늘의 얼굴… 그게 판소리의 매력”

풍물에서 소리로 발현된 내면의 끼


“고향이 내수인데 저희 집안이 ‘노래’하고는 사돈의 팔촌보다도 거리가 멀었어요. 대대로 농사를 지어왔죠.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도 ‘저런 새끼가 어떻게 우리 집에서 나왔나’ 하셨을 정도였죠.”
판소리를 26년째 해오고 있는 소리꾼 서동율 마중물 대표는 학력만 가지고 보면 이 바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청주 기계공업고등학교 정밀기계과를 나와 충북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하지만 예술 계통의 사람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그 역시 자신 내면의 끼를 부정할 수 없었다. 틈틈이 선·후배들과 풍물을 통해 시국을 논하며 마음 속 답답함을 떨쳐냈다.
1963년생인 그가 학교에 다닐 당시는 사회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그랬기에 풍물패의 활동과 생성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당시 지역에서 활동을 하고 있던 풍물패 ‘울림’은 지금과 달리 시민 강습이 주 업무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전문적으로 연희를 할 사람이 필요해지면서 각 지역 대학들을 상대로 공모를 진행했고 그 사람들이 모여서 1990년 풍물굿패 ‘씨알누리’가 탄생했다.
“저도 씨알누리 창립 멤버였죠. 그런데 준비 중인 창립 기념 공연에서 노래를 할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다 보니 제가 그걸 맡게 됐고 충주의 권재은 명창을 소개 받아 소리를 배우게 됐죠.”
노래를 배우다보니 지금까지 해오던 풍물보다 재미있음을 느꼈다. 1991년 창립 공연을 마치자마자 씨알누리에서 나와 소리의 길을 걷게 됐다.


“풍물을 할 땐 겉으로 보기에는 미친 듯이 치는 것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재미가 없었어요. 그런데 노래는 신기할 정도로 재미있더군요. 먹지 않아도 배가 안 고플 정도였어요.”
재미가 있다고 해서 그 분야가 마냥 즐겁지만은 않을 터. 특히 일반인들에게 판소리는 어려운 분야라는 생각은 거의 변하지 않는 고정관념에 가깝다. 그에게 소리는 어떤 의미일까.
“풍물은 10년 쯤 하면 ‘선생’ 소리를 듣는데 소리는 어림도 없어요. 준비 기간만 최소 30년은 봐야 하죠. 그런데 소리가 쉬웠으면 전 금방 질렸을 거예요. 어제의 얼굴이 다르고 오늘 보여주는 얼굴이 다른 게 바로 판소리입니다.”
사람들이 판소리라고 하면 떠올리는 것 중 또 다른 것은 ‘득음’이다. 폭포수를 맞으며 목이 터져라 소리를 외치는 도인 같은 모습으로 고착화된 그런 이미지 말이다.


“폭포 밑에서 피를 토한다? 그거 다 환상입니다. 피를 한 양동이 토하네 마네 하는데 그 정도 되면 그건 폐병 환자죠. 저는 목의 실핏줄이 터져 가래에 피가 섞여 나오긴 했는데 하다보면 고음과 저음을 마음대로 내게 되는 것이 득음 아닐까 싶어요.”
권재은 선생에게서 3∼4년 간 소리를 배운 후 1994년 서울로 올라갔다. 당시 예술공장 두레의 전신인 ‘열림터’의 서울 공연에 참가했던 상황이었다.
공연을 본 민예총 선배이자 ‘무당 시인’인 오우열 씨와 술자리를 하면서 씨알누리를 그만둔 후 민요만 하며 먹고 살 길이 막막했지만 그래도 활동은 하고 싶은데 청주는 길이 없다는 얘기를 했더니 오 시인이 자기와 같이 살자는 제안을 해온다.


“일산의 유명했던 막걸리 집을 소개 받고 거기서 서빙하며 노래하는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그 때 가수 강산애·김C와 같이 있었는데 강산애는 동갑이고 김C는 후배입니다. 지금 이렇게 유명해질 줄 알았으면 구박하지 말걸 그랬어요, 하하.”
아르바이트를 하며 소리꾼의 삶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던 그는 그러던 중 2000년 1월 전북도립국악원에 들어가게 됐다.
“거기서 1년 정도 근무했는데 당시 전북도지사가 도립의 민영화를 추진한다고 해서 난리가 났고 예술 감독들이 관련 기자회견을 가졌어요. 그런데 준공무원이 허락 없이 기자회견을 열었다며 도에서 해고를 시키더군요. 그때 예술인 노조가 결성됐고 저도 국악원에 사표를 낸 뒤 노조 집행부에 참가해서 싸우게 됐습니다. 그런데 노조끼리도 낮이 다르고 밤이 다르더라고요. 힘을 합해도 모자랄 판에 내부 싸움에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고 그만뒀습니다.”
노조에서 빠진 서 씨는 남원의 국립민속국악원에 비상근으로 3년 근무하게 된다. 그러다가 예술공장 두레에서 함께 하자고 해 역시 3년 정도 활동을 하다가 두레를 나와 프리랜서로 1년여를 지낸 뒤 연희단 후배들과 현재의 ‘마중물’을 만들게 된다.

 

비주류 아닌 주류로… 찾아가는 소리판 '소리풍류' 추진


30년을 바라보는 소리꾼 생활을 하며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
“소리를 시대로 구분하는데 250년 됐다, 300년 됐다는 말도 있고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다는 말도 있어요. 그런데 판소리의 음악적 계보인 제(制)로 보면 섬진강을 기준으로 운봉(남원)·구례·순창 등 전라도 동북지역의 동편제, 광주·보성 등 서남지역의 서편제, 경기·충청 등에서 일어난 ‘중고제’(中高制)가 있습니다. 동편제가 거칠면서도 호방하고 서편제가 정교하면서도 구성지다면 중고제는 그 중간이죠. 신제인 동·서편제보다 먼저 일어났다는 뜻에서 중고제(中古制)라고도 합니다. 중고제 시절만 해도 판소리는 전라도가 아니라 충청도가 중심이었어요. 예술인 조합의 우두머리를 대방이라고 했는데 충청도 출신이 아니면 그 자리에 앉지 못 했을 정도였죠. 그런데 이젠 판소리는 전라도라고 인식을 합니다. 안타까워요.”


소리든 전시든 마당극이든 찾는 사람들이 있어야 예술인들이 생활을 유지하고 장르의 명맥도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소리는 여전히 ‘주류’ 문화가 아닌 ‘변방’이자 전문적인 식견이 있어야 즐길 수 있는 장르로 생각된다.
“어떡하면 사람들이 오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해요. 그런데 여긴 사람들이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찾아가는 소리판을 만들고 싶어요. 마을에서 길게는 1시간 동안 3∼4일씩 소리 한 판을 다 들려주는 게 꿈입니다. 마을에 막걸리 싸들고 가서 ‘소리 들으며 놉시다’ 하는 거죠. 충북 순회공연이 일단은 목표입니다. 지금까지 연인원 700명 정도에 소리를 들려줬어요.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소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듣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하더군요.”
판소리의 대중화를 위한 서 씨의 포부는 상기한 ‘찾아가는 소리판’으로 축약된다. 좀 더 구체적인 그의 계획을 물었다.
“판소리는 어렵고 접하기 쉽지 않다는 인식이 아직 많은데 직접 들려주면 재미있다는 반응이 대부분입니다. 소리를 들으니 힘이 난다는 분도 계시고요. 전 이 일을 죽을 때까지 하고 싶어요. 그리고 찾아가는 소리판의 일환인 ‘소리풍류’를 연내에 재개하려고요. 판소리엔 북을 치는 고수가 필요한데 3년 전에 한 번 했고 이번엔 아내와 함께 하기 위해 약 1년 전부터 북을 배우게 했어요. 이게 많이 알려져서 공연 요청이 들어오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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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홍균 염종현 2016.12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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