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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수필

박순철

"죽는 날까지 독자와 교유하며 부끄럽지 않은 수필을 쓰고 싶어"

소        개 힘든 삶을 넘어 문학성을 확보한 수필가
활동분야 문학, 수필
활동지역 청주
주요활동 충북수필, 중부매일, 충북일보, 충청매일 수필 연재, 한국수필문학가협회
해시태그 #수필 #콩트 #문학 #충북수필문학회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인물소개

힘든 삶을 넘어 문학성을 확보한 수필가 박순철

“죽는 날까지 독자와 교유하며 부끄럽지 않은 수필을 쓰고 싶어”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을 만큼 가난하고 어려웠던 괴산 쌍곡 시절을 스스로 이겨내고 청주에서 수필가로 성장한 박순철. 누구나 쌍곡이라고 하면 산 높고 물 맑은 고향을 이야기하며 작가로서의 자양분을 떠올리겠지만 그에게는 가난하고 배우지 못해 허덕이던 고향일 뿐이다. 1972년 스물두 살, 청년이 되어서야 청주로 나왔다. 가난한 집안에서 공부도 못한 빈 몸으로 결혼까지 하자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직장을 구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어봤지만, 그를 기다리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여러 곳을 전전하다 스물일곱에 목도고등학교 고용직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하였다. 못 배운 설움을 딛고 서무과에서 일하는 틈틈이 도서실에서 책을 빌려 열심히 읽으며 문학에 대한 꿈을 꿀 수 있었다.

 

“글 쓰게 된 동기도 바로 거기에 있었어요. 남들처럼 이론도 없었어요. 혼자서 쓰는 것 연습하면서 배우게 된 거죠. 그렇게 날마다 쓰다 보니까 되더라고요. 누구든지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다는 말처럼 책을 많이 읽고 날마다 썼더니 되더라고요.”

 

처음에는 소설을 써보고 싶어서 습작 활동을 해보았다. 당시 삼방초등학교에 재직하던 최창중 소설가에게 보여주기도 하면서 문학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그러다가 최창중 소설가의 권유로 수필을 쓰기 시작하여 충청일보에 처음으로 수필을 싣게 되면서 용기를 얻게 되고 1990년에 이르러서야 <<동양문학>> 신인상으로 등단을 하게 되었다.

 

 

“운전 잘 하는 사람과 못 하는 사람의 차이는 면허증이라고 등단했다는 이름표만 받은 것이지, 등단한다고 다 해결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내가 쓴 글은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밀 것 같더라고요.”

 

등단만이 능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좋은 글이 받쳐 주지 않으면 그저 이름표만 얻은 것이라는 자신의 글에 대한 객관적 판단을 내리게 된 것도 김애자 수필가를 만나게 되면서부터다. 낱말 하나에서 문장까지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월간 <<수필문학>>을 통해 2회 추천을 받게 되는 혹독한 퇴고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때는 수필 쓴다고 하면 모두가 중앙에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뒤에 ‘사’자가 붙는 사람들의 글이었어요. 제가 목도고등학교에 근무한다고 하면 당연히 ‘국어교사’냐고 물었을 정도예요. 그런 아픔을 많이 겪었어요.”

 

북일초등학교로 옮겨 근무할 당시 전국 글쓰기대회에서 내무부장관상을 받게 되었는데 이름 앞에 교사라고 적혀있어서 종이로 가려놓았다. 기능직에 있는 사람이 상을 받는다는 것은 꿈 꿀 수 없는 현실이기도 했지만 물어보지도 않고 교사라고 적어놓은 상장 앞에서 배우지 못한 한과 현실의 한계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힘든 삶의 여정을 넘어 문학성을 확보하는 길만이 수필가로서의 삶을 결정짓는 것이라 믿고 날마다 공부하며 글을 썼다. 그때부터 충청일보와 동양일보, 중부매일, 충청매일 등에 연재를 하며 자신의 글과 이름을 알렸다. 1998년에 교육청 정식 사무원으로 전직을 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수필과 콩트를 연재하였다. 중부매일에도 4년 넘게 연재할 만큼 인기가 좋았다.

 

“첫 작품집은 2001년에 <달팽이의 외출>이라는 이름으로 냈어요. 그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출판기념회도 따로 했고요. 그 작품집으로 ‘충북수필문학상’도 받았죠. 아마 임원을 거치지 않고 바로 받은 건 제가 처음일 거예요.”

 

충북수필문학회 회원으로 단체 활동도 열심히 하며 받은 값진 성과였다. 그 뒤로 <예일대 친구>와 콩트집 <소갈씨>를 내며 수필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수필은 본래의 진실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콩트는 우리가 사는 다양한 삶을 끌어내어 풍자와 해학 등으로 보여주는 장르니까 끊이지 않고 써가고 있어요. 수필도 이제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공자 왈 맹자 왈 자신의 지식만 자랑하고 교훈적으로 쓰는 것만이 아니라고 봐요. 그런 건 행간에 숨어있고 재미를 느끼고 읽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해요.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서 남들이 겪은 삶과 현실의 다양한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충북수필문학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를 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그의 바람은 독자들과 끊임없이 교유하며 부끄럽지 않은 문학성을 확보해가는 데 있다. 충북중앙도서관을 마지막으로 정년퇴직을 하고 지금은 건물관리소장으로 새로운 삶의 현장에서 수필을 바라보고 있다. 교육청 산하 행정직 공무원들을 아울러서 <청풍문학회>를 만들어 초대 사무국장을 맡아 기틀을 다진 다음 후배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었다. 그는 이제 제2의 인생을 담은 작품집을 계획하고 있다.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려온 삶을 돌아보며 여행을 하며 재미있는 수필을 보여주고자 하는 꿈을 꾸고 있다.

 

“내년쯤에는 지금까지 써온 100여 편의 수필을 추려서 작품집을 내고 여행을 다니며 삶을 되돌아보고 싶어요. 콩트집도 내고 싶어요. 허튼 삶으로 빠지지 않으며 독자들과 교유하며 문학을 놓지 않는 것이야말로 삶을 놓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쓰는 글이 누가 읽어줄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노력해야죠.”

 

그의 길을 아직도 멀다. 가난하고 힘든 삶을 스스로 개척해 왔듯이 새로운 독자들과 만나며 문학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마음뿐이기에 하루를 거르지 않고 읽고 쓰는 일만이 남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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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서근원 2017.08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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