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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시, 교육

임승빈

"쉽게 감동하고 즐기는 소비예술보다 진정한 창조예술을 향해가자"

소        개 궁극을 의문하는 시인
활동분야 문학, 시, 교육
활동지역 청주, 충북
주요활동 충북예총, 시 창작 및 교육
해시태그 #임승빈 #문학 #시 #창작 #교육 #충북예총
인물소개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던 문학소년

 

임승빈 시인은 보은 출신이다. 교직에 계셨던 선친과 주변 환경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에는 글쓰기와 웅변을 함께 했다. 그러나 글쓰기에는 그렇게 큰 재능을 보이지 못했고, 오히려 웅변에서 두드러진 재능을 보였다. 그리고 그때 익힌 웅변은 그에게 남 앞에 서는 용기와 언어적 감각을 익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선생님이었던 조남익 시인의 눈에 띄어 오랜 전통을 지닌 <한모문학동인회>를 통해 시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대학에서 국어국문학를 전공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정신의 성장에 목말라하던 고등학교 시절 <한모문학동인회>는 임승빈 시인에게 큰 자극이고 자긍이었다.

 

 

인생 최고의 은사를 만나다

 

“시인은 시를 쓰기 전에도 고독하고, 시를 쓰고 난 후에도 고독할 수밖에 없어. 왜냐하면, 고독하지 않고는 남과 다른 시선과 사유를 가질 수가 없고, 시를 쓰고 난 후에도 그것이 또 진정한 창조라면 그 누구도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 그 고독을 견뎌내야 하고, 즐길 수 있어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고독을 잡아다가 가슴 속 항아리에 쑤셔 넣을 수 있어야 해. 그 고독을 발효시켜 빛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어야 하고. 그래야만 진정한 시인인 게지. 명성을 추구하는 거, 그건 그야말로 속물이지.”

 

임승빈 시인은 대학에서 인생 최고의 은사님을 만났다. 바로 195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김상억 시인이다. 엄격한 성품과 철저한 자기관리로 지독한 고독을 결코 겉으로 드러내 보이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훌륭한 시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내 주겠다는 시집 출판도 마다하고, 결국 돌아가실 때까지 한 권의 시집도 남기지 않았을 만큼 언제나 고결한 모습이었다.

 

그런 은사님의 겸손을 나이가 들어서야 깨닫는다는 임승빈 시인. 이미 낸 다섯 권의 시집 중에 쓸 만 한 것이 별로 없어 부끄럽기 짝이 없다는 임승빈 시인. 임승빈 시인에게 은사이신 김상억 시인은 늘 새로운 깨우침의 계기였다.

 

 

치열했던 문학열

 

고등학교 시절, 매년 동인지가 발간되면, 동인지 이름을 딴 『석란제』라는 문학의 밤이 열렸다. 그러면 지도교사였던 조남익 선생님은 어김없이 졸업한 선배 문인들은 물론, 박용래, 한성기, 임강빈 등 지역에서 활동하던 훌륭한 시인들을 함께 초청했다. 그중에 임승빈 시인을 가장 설레게 한 것은 한성기 시인이었다. 짧은 상고머리를 하고, 언제나 아무 말 없이 입가에 미소만 잔잔하던 시인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씬 다정다감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읽었던 시집 『낙향이후落鄕以後』는 하도 끼고 다녀서 겉에 씌운 표지가 달아 없어지고 말았다. 그런 한성기 시인을 우러르며 ‘나도 언제 저런 시인이 될까’하는 선망으로 설레곤 했다.

 

대학에 입학하고부터는 김상억 시인을 만나 또 당신 같은 시인이 되고 싶었다. 대학 졸업 직후인 1979년 8월, 『월간문학』 신인상에 가작으로 입선을 했다. 1980년인가부터 대전의 같은 연배들과 <문文과 율律>이란 동인회를 만들어 다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그동안의 ‘우물 안 개구리’식 공부에 대전에서의 모임은 큰 자극이 됐다. 1박 2일로 하는 합평회는 하도 치열해서 자주 가던 대흥동의 <동양여관>은 자연스럽게 <동양체육관>이 됐다. 신춘문예 시즌이 되면, 몇 달을 거의 매주 만나 합숙을 하다시피 했다. 시 파트는 임승빈 시인보다 몇 살 위이고, 1979년에 이미 중앙일보 신춘으로 등단했던 손종호 시인이 주도했다. 낙심한 임승빈 시인이 약속 장소에 안 나타나기라도 하면, 손종호 시인이 청주까지 찾아와 시작노트도 함께 뒤적이며 격려를 했다. 그리고 1983년에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으로 문단에 얼굴을 내밀었다.

 

임승빈 시인은 지금까지 『아버지는 두릅나무 새 순만 따고』(1986년), 『분리된 꿈』(1991년), 『속초행』(1994년), 『하늘뜨락』(1998년), 『흐르는 말』(2010년) 등 다섯 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그는 시에서 가장 경계할 것이 관념이고, 설명이라고 말한다. T. S. 엘리엇의 ‘시는 정서로부터의 도피’라는 말을 빌어 시의 주지성主知性을, 김수영의 ‘시는 정서의 표현이 아니라, 정서의 구체화’라는 말을 빌어 일반 독자들이 좋아하는 격언이나 금언 식의 아포리즘(aphorism)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시의 적이라고 강조한다. ‘무엇(what)을 쓰느냐’보다는 ‘어떻게(how) 쓰느냐’가 시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말한다. 그러다보니 그의 시는 관념이나 사회현실보다는 존재 양식에 대한 사유, 즉 존재론적 경향이 지니고 짙다.

 

 

창조적 예술을 위하여

 

지난 2월부터 충북예총 회장직을 맡고 있는 임승빈 시인은 현재의 충북문단과 예술계를 이렇게 진단한다.

 

“1980년대 중반부터 우리 사회는 개인의 가계소득 증가로 누구나 쉽게 예술을 향유할 수 있게 됐고, 직접 창작활동을 하고, 쉽게 개인저서를 출간도 할 수 있게 됐다. 쉽게 획득한 문화적 명예를 도구로 신분상승을 꿈꿀 수 있게도 됐다. 하나의 중심이 폭발하면서 여러 개의 중심이 상존하는 다원중심주의 사회가 됐으며, 그로 인해 탈권위주의 시대가 됐다. 일방소통주의 사회가 다 방향 쌍방소통주의 사회가 됐으며, 탈권위주의사회에서 시인도 더 이상 지식인이나 선지자도 아니었다. 1990년부터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선출직인 단체장들은 많은 사람이 함께 하는 행사 위주의 예술만을 중요하게 여김으로써, 창조성이 강해 낯선 예술보다 대중들이 쉽게 감동하고 즐기는 소비예술적 경향이 강해졌다. 즉, 낯선 창조예술보다 쉽게 감동하고 즐기는 소비예술의 시대가 되고 만 것이다. 상상과 사유를 유발함으로써 그 힘을 향상시키는 창조예술이 아니라, 보기 좋고 장식적인 소비예술이 판을 치는 사회가 되고 만 것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이, 장식적인 예술의 수준으로 쉽게 이름을 얻은 사람들이 문화적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고독과 겸손을 바탕으로 창조에 매진하는 진정한 예술가들은 오히려 뒷전으로 밀려나는 상황이 도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쉽게 감동하고 즐기는 소비예술보다 창조예술을 지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관객이 많이 모이는 예술행사를 우선적으로 지원하는 풍토부터 바꿔야 하고, 지역예술가는 뒷전이고, 유명 연예인만 우선하는 풍토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비록 작은 무대일지라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늘 함께 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진정한 창조예술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예술의 본류를 찾는 일, 사유를 통해 나를 변화시키고 작품을 통해 독자를 변화시키는 예술이야말로 사회의 창조적인 힘을 배가시킬 수 있는 예술이라는 것이다.

 

그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임승빈 시인은 고독해질 수가 없다. 시도 써야 하고, 2006년부터 11년째 내고 있는 시전문계간지 『딩아돌하』도 내야하고, 학교 강의도 해야 하고, 이 지역사회가 맡긴 충북예총이라는 직이 그를 예술의 현장으로, 작가의 작업실로 쉬임없이 내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늦은 밤이면 그는 자신만의 창가에서 시를 생각한다. 이미 타계하신 은사님과 함께 궁극의 의문으로 긴장하고, 또 그 긴장으로 기분 좋게 설레인다. 그러면서 그렇게 고독했던 은사님에 대한 사유로 다시 새로운 소설도 한 번 시도해 보고 싶다는 꿈을 꾼다. 언제쯤에나 우리는 그 소설의 새로운 사유로 설레일 수 있을 것인가.

사진 발행일 제작/출처
김영범 서근원 2017.11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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