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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한국화, 무대미술

민병구

"마음의 선을 정해 구부러진 선을 그려보다"

소        개 투박하고 무거운 광목 페인트 그림처럼 무게 있는 인생을 살아온 예술가
활동분야 미술, 한국화, 무대미술
활동지역 청주
주요활동 미술, 한국화, 무대미술, 충북연극협회부회장, 중부무대미술연구소
해시태그 #미술 #한국화 #무대미술 #중부무대미술연구소 #충북연극협회
인물소개

투박하고 무거운 광목 페인트 그림처럼 무게 있는 인생을 살아온 예술가, 민병구


삽화 잘그려 인사동까지 다녔던 소년


한국 화가이며 무대 미술가인 민병구는 청주태생으로 79년 중학생 시절 만화를 잘 그리던 소년이었다. 당시에 헌책방에서 사군자 묘법책을 보고 구입해 따라 그려보면서 그림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인사동을 찾은 소년은 한국화를 보게 되었고, 만화를 잘 그리던 소년은 신문과 잡지에 만평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청주와 서울로 오가며 만화가 밑에서 파트별 분담을 맡아 그림을 그렸고 일주일에 한 번씩 흰 고무신을 신고 서울 인사동 전시장에 드나드는 소년을 근처 표구사 주인들이 알아볼 정도였다.
“고등학교 때 민전에 입선을 했어요. 그런데 기초도 없이 공모전 냈다고 건방지다고 미술 선생님께 맞았아요. 그것이 학교와 담쌓은 계기가 되었죠. 그 다음해엔 특별상을 받았어요.”
이후 서울에 살게 된 민병구는 방송국 알바를 하면서 무대미술를 하게 되었다.
“당시에 이창구 선생님, 전원일기의 차범석 교수님이 학교공연 무대미술 맡으셔서 그 일을 하게 되었죠. 89년도인데 무대일이 무척 힘들어서 하지 않으려고도 했어요. 그런데 청주의 극단 <새벽>의 선배들이 도와달라고 연락을 해와 ‘오델로’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무대미술을 하게 되었지요.”


그림으로 돈도 벌고, 빈털터리도 되고


학교 공부를 하지 않은 탓에 하루에 책 5권씩을 읽으며 홀로 공부에 나섰다. 김동리 선생의 백일장에 글을 내기도 했는데 ‘진정한 생활글’이라며 시인이자 언론인이었던 구상 선생이 김동리 선생의 ‘을화’를 선물해 주기도 한 일화도 있다. 만화 삽화 작업을 계속핟 87년에 연 개인전에서는 그림이 다 팔리기도 했다. 당시는 청주에서 미술이 막 활성화 되던 시기였다. 그 탓에 지역 몇몇 미술계 인사로부터 괄시도 받았다. 그렇게 번 돈으로 종이값도 벌고, 동생들 학비며 생활비도 벌었다.
그런데 열심히 살아 온 그에게 시련이 닥친건 아마도 IMF 이후 97년이었다.
“사창동 화실을 문 닫고 빈털터리가 되어 고향인 내수읍으로 돌아왔어요. 창고 안에 비닐하우스 짓고 그림만 그렸어요. 그렇게 10년을 그렸어요. 결국 99년에 건강악화로 의료원에 입원도 하고 퇴원 후 미래가 암담한 상황이었어요. 이때까지도 무대미술 장르는 길이 없어 보였죠. 2005년경 건강, 경제문제 등으로 상황은 더 악화되었어요. 좌절과 절망감에 좋지 않은 선택도 했는데 다시 살아났어요. 그 때 목을 다쳐 노래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어요.”


마음의 선을 정해 구부러진 선을 그려보다


잘나가던 시기와 시련의 시기가 급작스러웠던 것처럼 그의 재기 역시 극처럼 찾아왔다.
“2002년 진천 화랑제 때 예술가들과 낮술을 마시고 있는데 어떤 스님이 다가와 ‘책이나 보던지 해야지 할 일 많은 사람이 왜 그러고 다니느냐’고 꾸중을 했어요. 그 말을 듣고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얼굴이 하얗게 되면서 마음에 변화가 왔어요. 스님은 일주일 안에 변화가 있겠다고 말해 주고 갔는데 정말 변화가 왔지요. 무대미술로 목돈도 벌게 되었고, 작업장도 넓히고요. 그 전까지는 계속 그림을 그렸어도 완성된 그림이 몇 없었는데 그 이후로는 손대는 그림마다 완성이 되기 시작했어요.” 그렇지만 오랜 시련의 시기 탓인지 항상 마음을 가다듬고 조심하는 습관이 들었다.
“항상 집을 나서거나 들어갈 때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 대해 마음의 선을 하나 정해 구부러지는 선을 그려보라는 옛 선현들 말씀”을 새기며 산다.


천상 프로 무대미술가


그는 청주에서는 누구보다 무대미술 설치가, 작업가로 알려져있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는 그 이지만 그런 그를 만든 것도 고마운 청주 연극인 선후배 덕분이라고 한다.
“청년 극단 단원들과 가족처럼 지내고 있어요. 무대미술은 현실이 가상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이고 또 다른 이미지 표현이죠. 여기에 생명을 불어 넣는 것은 배우들의 몫이고요. 광목에 페인트를 그려 배경을 만들어요. 무대미술에는 예술성이 있어야해요.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한 배경은 그런 예술성을 보여주기 어렵죠. 대본을 받고 분석하고 밑그림부터 설계도까지 그린 후 연출자와 상의하고 필요한 자재를 갖고 와 작업을 하죠. 색 쓰는 것이 무대의 색을 좌우하기 때문에 조명관계도 파악해야 해요. 배우들의 의상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전기, 기계, 설비 등 종합적인 안목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이 무대미술이예요.”
막힘없이 술술 무대미술을 읊는 그에게서 프로의 애정과 열정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일이 힘든 탓에 무대미술의 맥이 끊기도 있다며 아쉬움을 얘기한다. 그럼에도 그가 무대미술을 하는 이유는 먹고 살려고가 아니라 “내가 저 일을 하지 않으면 빨리 죽을 것만 같아서”이다. 무대를 만드는데 용접이 필요하면 용접일을 배우고 목공이 필요하면 목공도 했다.


새로운 도전들


근래에는 한국화 작업도 꾸준히 하고 있다. 요즘에는 부엉이를 주제로 그림을 그려 전시해도 열었다. 호텔 객실에 걸고 캐릭터로 사용하겠다는 고객도 생겼다. 또 한편으로는 무대미술 기록을 위해 지금까지의 작업 2,800여 대표작을 정리 중이다. 오랜 세월 청주의 연극 역사를 보고 싶다면 그의 도록을 봐도 좋겠다. 페인트가 잔뜩 묻은 작업복이 일상복이라며 껄껄 웃으며 인터뷰를 마친 그는 사무실을 나와 페인트 냄새 가득한 건너편 작업장으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오니 짧은 겨울해는 이미 서산을 넘어 캄캄해져 있었고, 덩치 좋은 그의 작업실만 대낮같이 불을 밝히고 망치소리가 흥겹게 저녁하늘로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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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 이재복 2016.12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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