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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춤

정수석

“제 이름처럼 영원한 수석 춤꾼으로 남고 싶어요”

소        개 영원한 취발이, 마당극의 수석 춤꾼
활동분야 연극, 춤
활동지역 충북
주요활동 마당극 배우, 춤꾼
해시태그 #취발이 #마당극 #연극 #춤 #충북민예총 #정수석
인물소개

영원한 취발이, 마당극의 수석 춤꾼으로 남고 싶은 정수석

제 이름처럼 수석 춤꾼으로 남고 싶어요.”

 

지금은 춤꾼으로만 알려져 있는 정수석의 전공은 경제학이다. 소싯적에 공부 좀 하고 놀기도 잘하는 학생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마이클 잭슨의 문 워크에 빠져서 춤을 추기 시작해서 중학교 때는 서울에서 유행한다는 춤은 다 추었을 만큼 끼가 넘쳤다.

웨이브, 팝핀, 로보트 춤까지 웬만한 춤은 다 섭렵했죠. , 담배, 당구는 기본이고 영등포 쪽에 입장료가 천오백 원인가 하고 콜라 한 잔 주는 나이트 엄청 다녔죠. 그러면서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원칙은 있었죠. 부모님 뜻대로 경제학과를 갔는데 연극반에만 관심이 있었어요. 91년 민족극운동협의회가 생긴 지 얼마 안 되던 해니까 당연히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어요. 마당극은 탈반에서 하고, 우리는 연극반이라 정극을 많이 했죠. 주로 번역극보다는 창작극을 하자는 게 원칙이었는데 그때 동아리 활동하면서 1년에 다섯 편정도 공연을 했던 것 같아요.”

 

대학생활의 꽃이 동아리 활동이었던 시절이었으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경희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뒤 그가 연극반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회적 이슈가 많고 집회성 공연이 끊임없이 펼쳐지던 대학가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신입생 시절에 보았던 노래판굿 꽃다지 공연은 압권이었다고 한다. 노동연극의 대부라 불리는 극단 현장의 박인배 선생을 만나고 민주대머리로 불렸던 박철민(현재 영화배우) 등이 주축이 되어 서울 지역의 모든 풍물패와 노래패가 펼치는 공연이었기에 전율이 돌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수만 노동자와 학생들이 판굿을 펼치고 나서 거리로 나가면 바로 투쟁현장이 되던 때였으니까요. 그때 결심했죠. 나중에 극단에 들어가면 저기를 들어가야겠다고요. 대학을 왜 다녀야 하는지, 군대 문제며 취직 문제로 고민하던 것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했거든요.”

 

 
극단에 들어가다

결단은 빨랐다. 직장 생활 2년 만에 극단 현장에 입단을 한 것이다. 2002년에 대학로에서 공연을 하던 극단 현장을 본 후 바로 극단생활을 하게 되었다. 때마침 극단 현장도 노동 문제 중심에서 환경 문제를 다루거나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내느냐를 고민하던 시점이라 가능했던 일이다. 마당극도 노동자 대상만이 아닌 가족 마당극 형식과 중요한 사회 의제들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서울이 너무 싫어서 청주의 열림터며 진주에 있는 큰들, 대전 우금치 극단 쪽을 알아보고 있었어요. 그럴 때쯤 불쑥 극단 현장을 찾아가 식구가 된 거죠. 그때가 5월인가 6월쯤 되었을 때인데 8월에 바로 민족극한마당에 배역 하나 맡아서 공연까지 하게 되었죠.”

 

첫 배역은 인천 지역에서 활동하는 노래패 중에 암으로 돌아가신 분의 삶을 다룬 연극이었다. 문화패들이 조합 안에서 다 깨져나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라 그에게는 거대한 연대의 힘으로 가야 한다는 극의 중심 내용이 마음에 들었다. 웨이브, 팝핀을 할 줄 안다는 것만으로 노래패 인물의 딸을 가르치는 춤 선생 역할이었다. 브레히트의 서사기법대로 객관적인 거리두기와 노래 부를 때 몰입보다는 과거를 회상하듯 편하게 부르며 객관화시키고자 한 작품이라 그에겐 기억에 남는 작품이었다.

 


마당극의 세계로

그런 그가 다시 극단 현장을 떠나 청주로 오게 된 것은 마당극의 세계에 새롭게 접어들면서이다. 극단 현장 시절 봉산탈춤의 형식을 빌려서 시대를 대변하는 이야기를 담아보고자 시도했던 것이나 예술공장 두레의 오세란 선생을 만난 것이 큰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하고 난 뒤에 수원에서 풍물하시는 선배가 탈춤이 극단현장을 만나서 고생한다고 말하는 거예요. 춤을 너무 못 춘 저를 발견한 거죠. 그래서 연습을 무척 많이 했어요. 휴일 없이 쉬는 날에도 계속. 그때 오세란 선생이 어느 날 호흡이라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장구를 칠 때 이라는 느낌을 몸으로 느낀 것 같아요. 선배가 쳐주는 장구에 맞춰 굿거리장단을 걷는데 저도 모르게 몸이 이상해지면서 그 느낌이 생기더라고요. 오세란 선생님이 바로 그거야!’ 하고 소리를 질러 주시는 거예요.”

 

다시 온 취발이였다. 봉산탈춤에 나오는 취발이가 주인공이 되어 사무직 노동자들의 애환을 전하는 이야기였는데 국립국악원과 해외공연으로까지 이어지며 춤꾼으로서의 그를 다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 오세란 선생의 권유로 청주와 인연을 맺고 민족춤패 너울의 사무국장을 맡아 활동하게 된 것도 취발이 덕분이었다.

그런 취발이를 뜨내기에 역마살이 낀 존재로 보고 있다. 조직에는 어울리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이기 하지만 무엇보다 그를 가리키는 말은 영원한 춤꾼이다. 또 다른 변화의 시점에 있기에 그를 진정으로 고민하게 만드는 지점이 생긴 것이다. 그렇다고 안으로만 움켜쥐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믿는다. 자신 안의 감정을 역동적으로 드러내며 그동안의 역사를 한번 되짚어 볼 시기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어떤 춤을 췄고 또 어떤 작품으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하는지에 대해 살펴야 할 시기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월호 참사가 가장 큰 영향을 주었어요.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분노가 일고 눈물이 날 때 친구가 첫 을 치는데 그 떵이 다르게 들리더라고요. 촛불들 속에서 공중 도약을 한 번 했다가 내려오면서 을 치는데 그 마음이 다 느껴지더라고요. 소위 말하는 신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뒤로 정신을 차리고 다시 무대 위에 설 수 있었죠. 항상 무대에 있을 때 진정성이라는 것이 생기는구나 하는

 

 
, 네 몸에서 장단이 느껴져!”

그래서 아직도 그가 신념처럼 받아들이는 한마디는
, 네 몸에서 장단이 느껴져!” 이다. 취발이의 꿈은 단순하다. 팔도 춤꾼들이 모여서 만인보 같은 작품을 해보는 것이다. 용산참사를 겪은 유족 앞에서 즐겁게 놀아주는 것이야말로 긴 싸움 끝의 위로이자 신명이었듯이 그는 영원한 춤꾼으로 남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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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정상민 2019.03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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