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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영화

유순웅

“불러주면 죽을 때까지 배우 생활을 할 거예요.”

소        개 영원한 염쟁이 유씨, 유순웅 배우
활동분야 연극, 영화
활동지역 서울, 청주
주요활동 배우
해시태그 #연극 #배우 #영화 #염쟁이유씨 #유순웅
인물소개

영원한 염쟁이 유씨, 유순웅 배우

불러주면 죽을 때까지 배우 생활을 할 거예요

 

꿈을 좇아 달려온 길

 

그는 현재 충북민예총 이사장이라는 공식 직함을 가지고 있다. 가끔 영화에 나오기도 하면서 시골에 텃밭농사를 짓고 있다. 어딜 가든 그는 염쟁이 유씨라는 이름으로 불리다 보니 그가 배우라는 것을 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는 천상 배우다.

 

배우가 먼저죠. 극단에서 배우로 시작했지만 우리 지역에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연출을 하게 된 케이스예요. 사실 대학에 갈 때는 신학을 했어요. 기독교 집안이라 한신대학교 기독교육과를 갔는데 탈반과 연극반 활동을 하다가 사상이 바뀌었죠.”

 

82년 무렵이다. 신학대학에서 궤도수정 뒤 찾아온 위기는 뜻하지 않은 폐결핵이었다. 87년쯤 요양 차 청주에 내려왔다가 우리춤연구회와 인연이 된 것이 폐결핵이 가져다준 선물인지도 모르겠다. 몸무게 40㎏이 빠질 만큼 악화된 상황에서 온 휴지기가 새로운 전환을 가져온 것이다.

 

우리춤연구회는 춤 공연뿐만이 아니라 지역의 문화운동을 대표하는 곳이었죠. 풍물 강습에 탈춤 강습, 마당극 공연을 두루두루 했었어요. 그러다가 89년엔가 놀이패 열림터로 이름을 바꿨어요. 그 시대에 맞는 마당극 위주로 공연을 하다 보니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정체성이 애매해지고 이름을 아예 바꿔버린 거죠.”

 

열림터로 이름을 바꾼 후 그가 고민하던 지점은 문화예술공동체였다. 단원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고집을 내려놓고 타협한 것이 예술공장 두레란 이름으로 마련한 옛 청원군 내수읍의 광암리 무대였다. 단체생활을 하며 시골에서 예술을, 공장에서 제품 찍어내듯이 만들어보자는 뜻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연 것이다.

예술공장 두레는 작게는 연극공동체, 넓게는 미술이나 문학 등 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들어와서 살 수 있는 문화예술공동체로 전국 최초의 시도였다.

그러나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단원 간의 갈등을 배제할 수 없었다. 그가 평생 꿈꿨던 문화예술공동체였지만 모든 단원들의 뜻을 거슬러가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예술공동체에서 1인극으로

 

지금도 인기리에 공연하고 있는 <귀향>은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킨 작품이면서 예술공장 두레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된 작품이다. 덕분에 빚도 어느 정도 갚고 단원들에게 고민 없이 월급을 줄 수 있었지만 그는 과감하게 내던지고 1인극으로 내려온다.

 

김인경 작가에게 1인극 한 번 만들어보자고 제안해서 만든 것이 염쟁이 유씨였어요. 이런저런 아이디어 회의를 거치다가 염이라는 소재를 선택한 거죠. 초고 쓰고 리딩하고 문제점을 고치면서 거의 1년 동안 작업했어요.”

 

20045월 염쟁이 유씨는 극단 새벽 무대에서 첫 선을 보였다. 무엇보다 기동성이 강한 1인극 형태라는 것도 신의 한수였다. 청주 공연으로 시작해서 서울은 물론 전국 공연으로 확장해가고 싶었던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연을 본 어떤 사람에게 국립극장 프로그램의 하나인 <배우열전>에 출연해보라는 제안을 받았어요. 그렇게 서울 관객들과 처음 만난 거죠. 사실 공연 첫날에는 유료관객이 한 명이었어요. 그런데 끝날 때가 되니까 터지기 시작하더라고요.”

 

지역 공연이 서울에서 통하는 기적을 일으킨 염쟁이 유씨의 탄생이었다. 지금까지 3천 회를 넘기는 초장기 공연이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로서는 염쟁이 유씨로 여기까지 온 사실에 대해 무한한 감사와 신뢰를 할 뿐이다.

 

언젠가 스르륵 사라지는 배우로서의 삶
 

불러주면 죽을 때까지 배우 생활을 할 거예요. 불러주지 않으면 아마 잊혀진 배우가 되는 거죠. 내가 시골에 들어오게 된 계기도 그거예요. 언젠가 스르륵 사라지는 게 배우더라고요. 그러니 스트레스가 너무 심한 거예요. 괜히 공황장애가 오는 게 아니더라고요. 여기 와서도 일이 없으면 불안한 건 비슷하지만 조금 달라요. 언제든 나가면 풀이라도 뜯을 수 있는 일이 있고, 일하다 보면 다 잊어버리거든요.”

 

그는 배우로 살면서 지역 일꾼으로 살고 있다. 염쟁이 유씨로 바쁠 동안 지역에 손을 놓고 지내다 보니 부채의식도 있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을 기리는 <선택>의 연출을 맡으면서 충북민예총 이사장 역할까지 맡아 활동하는 것도 그가 이곳에 문화예술공동체를 만들고자 꿈꾸었던 탓이다. 염쟁이 유씨가 지역에 있는 한 꺼지지 않는 꿈인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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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문호영 2019.08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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