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훈
'전환의 계기로서의 팬데믹'
전환의 계기로서의 팬데믹
인터뷰 하는 두 시간 내내 한상훈은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부었다. 사실, 그에게 코로나19는 활동에 있어 그리 큰 변수가 아니다. 올해 그는 17년을 일한 조직을 그만 두고 독립했다. 딱히 코로나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쉬고 싶었던 참이었는데 시기가 겹쳤을 뿐이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들은 그 자신의 이야기보다 주변 예술가의 이야기가 더 많다. 물론, 이유가 있다. 그 자신이 꾸준히 사람들을 거들며 지원하고 다양한 관계들을 엮어내는 포지션을 오랫동안 가져왔기 때문이다. 조직을 나왔다지만, 그는 여전히 분주하다. 오히려 조직 안에서 실행하지 못했던 일들을 더 많이 벌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사람들은 그에게 하소연을 하고, 사람을 소개해 달라 하고, 서류를 어떻게 정리하는지 묻고 상의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올해 특히 코로나로 일상적인 행사들이 많이 멈추며 예술가들은 전에 없이 자신의 활동을 깊이 들여다보고, 서로의 고민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 과정에서 예술가들이 맺는 관계의 밀도 역시 높아졌다. 수많은 행사를 기획하며 예술가들과 현장활동을 연결해 온 한상훈에게 사람들의 그런 고민이 전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상훈에게 들려온 고민 중에는 브라질 타악을 하다 영상 제작으로 직업을 바꾸는 결정을 내린 예술가가 있었다. 또, 방송에서 슈퍼루키로 선정될 만큼의 실력을 가진 뮤지션은 단지 판매가 가능하다는 이유로 패브릭 아트로 전향을 고민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듣지 못한 수많은 고민들 중에는 이렇게 생계를 위해 업종을 전환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압박들이 숱하게 존재할 것이다. 물론, 예술만이 지고지순의 가치를 가지고 있고 다른 활동들이 그에 못 미친다는 결론은 위험하다. 다만, 강제되는 조건들로 자신들이 가치를 부여했던 활동에서 내몰리는 이들에게 마음이 쓰이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 코로나19는 많은 예술인들에게 자기 활동을 곱씹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거기에 생계에 대한 막막함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 역시 명확하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고 했던가? 예술이 가진 조건과 토양이라는 게 이렇게나 허약하다는 것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한상훈이 보기에는 지금의 현실이 마치 이전까지 희뿌연하게 김이 서린, 혹은 안개가 끼어있는 것처럼 예술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다가 갑자기 뜨거운 햇볕 아래 노출된 거나 마찬가지다. 지역에서 예술은 원래 존재감이 없었고, 지역 예술이 어려움을 겪은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오히려 코로나 정국에서는 예술현장과 예술인이 갖는 어려움을 사람들이 알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 아닐까도 생각한다. 물론, 코로나로 인한 어려움을 외면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그것이 오롯이 팬데믹에서 비롯되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기회에 지역의 예술현장이 자기 동력을 가질 수 있도록 근본적인 전환을 만드는 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대구에서는 뚜렷하게 문화정책을 다루는 매체나 지자체에 종속적이지 않은 독립적인 연구집단이 없다는 생각이 향후 그의 활동의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특히 예술인등록조차 쉽지 않은 다원예술이나 독립예술 씬이 자리잡기 위한 아카이빙과 의미화 작업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코로나 정국에서 자신의 자리를 적극적으로 마련하고 사회와 소통한 예술가들도 있었다. 한상훈은 그들을 두고 ‘아메바 같은 생명력’을 지녔다고 이야기한다. 연극 현장에서 소품을 만들던 경험을 바탕으로 천 마스크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눠주던 가수와 연극인들, 사람들에게 성금을 걷어 노숙인들에게 도시락을 나눠주는 역할을 감당한 시인, 코로나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를 가진 미등록 이주여성들에게 마스크와 아기용품을 지원하던 예술가들. 이들은 이전에 이미 사회적 약자들과 두루 활동을 함께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빠르게 이런 활동을 수행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들의 움직임은 특히 코로나 초기의 대구에서 예술가의 쓸모라는 것을 보여주는 활동이 되었다.
한상훈은 영상화 작업에 회의적이다. 결과보고용으로 찍어내는 영상은 누구에게도 어필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영상화에는 그만한 고민과 인력과 시스템이 필요한데, 현재 만들어지는 영상들은 지나치게 주먹구구식이다. 유료화는 언감생심, 아직은 갈길이 멀어 보인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 중에 영상에 대한 이해를 높여야 한다는 대목이 인상깊게 남았다. 비대면사회가 급격하게 도래하는 통에 영상에 대한 요구는 높아만 지는데, 현장 예술가들이 영상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다보니 영상을 촬영하는 데 있어 엉뚱한 요청이 많다는 것이다. 비단 작업에 대한 대가 문제만이 아니다. 실제 영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구조를 알지 못하면 영상화 자체의 밀도를 높이기 어려운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아닌가. 그가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사무국장에게 영상활동가들의 작업 가이드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제안한 까닭이다.
그는 코로나19가 본인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전까지 공공기관의 사업을 하면 성과를 보이기 위한 쇼잉(showing) 작업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감염병 정국이 되니 대중을 상대로 한 오프라인 활동이 멈추었고 이는 오히려 사업의 밀도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독립영화제 오프닝 공연이 무산되자 공연을 하기로 했던 뮤지션들과 독립영화 감독들을 연결해 영화음악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성사시켰고, 관변행사에 가까워지던 2.28 국채보상운동과 관련해서는 역시 행사가 불가능해지자 프로젝트를 바꿔 당시 불렀던 광장의 노래들을 찾아내 음원으로 만들어냈다. 이전까지 공공기관이 사업의 변경에 있어 강력하게 규범적인 태도를 견지했다면, 팬데믹 정국에서는 대폭 협조적인 태도로 바뀌었다는 것도 시사점을 남긴다. 사업의 성과를 어디에 둘 것인가의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코로나19 상황에서 비대면 활동과 영상만이 강조되는 풍토에 그가 실험한 ‘전환’들이 여러 가지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한상훈은 77년생 남성, 마흔넷의 문화활약가(?)이다. 2005년부터 (사)대구민예총에서 16년간 사무처장으로 일하면서 활동지원, 기획, 연출, 정책연구, 네트워크 활동을 우후죽순 펼쳐내며 예술현장의 밑바닥을 긁고 다녔다. <갑질박멸예술난장>, <자립예술가축제>, <저항예술제> 등 정신 사나운 예술난장을 자주 벌여댔고, 민예총에서 퇴사한 후, ‘활동가’의 한계를 벗어난 자칭 ‘문화활약가’라고 떠벌리며 이곳저곳에서 식스맨(대체 선수) 노릇을 하고 있다. 평소에 관심이 많았던 대구지역 자립-다원-독립예술씬의 활성화, 거리문화, 취향공동체 확산 등과 관련된 다양한 현장실무자들의 사방팔방 연대를 모토로 ‘대구문화예술현장실무자정책네트워크’를 구성하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안태호 : 어떤 활동을 주로 하고 있는지 설명 부탁한다.
한상훈 : 문화기획/행정이라고 하지만 잡다한 일을 했다. 시민사회 활동가로 대구에서 문화예술과 관련된 진보적인 정책, 예술가 서포팅, 네트워크 등을 수행해 왔다.
안태호 : 그 와중에서 말하자면 기획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한상훈 : 그렇게 볼 수 있겠다. 예술인 등록에는 전시기획으로 되어 있다.
안태호 : 올 한 해 개인적인 활동들은 어떤 영역에 집중했나.
한상훈 : 올해 5월 대구민예총 사무처장을 그만뒀다. 코로나 때문은 아니고 좀 쉬고싶었는데 시기가 겹쳤다. 나오면서 대구민예총에서 이어가지 않는 사업들을 가지고 나왔고, 급한 도움을 요청하는 곳의 일을 도왔다. 주로 인디음악, 독립출판 관련 네트워크를 가동하고 지원하는 일들이었다. 코로나 관련 지원사업이 나왔을 때 행정이 안 되지만 뭘 하고 싶다고 하면 페이퍼화 해주는 일도 많이 했다.
안태호 : 코로나19로 인해서 어떤 활동의 변화가 있었나. 본인을 포함해 주변의 활동가나 예술가들의 변화를 함께 이야기해 달라.
한상훈 : 원래 있던 문제를 더 두드러지게 한 게 코로나19인 것 같다. 원래 지역예술이 잘 안 됐는데, 지원을 통해서 연명했던 것도 많았다. 시장성이 없기도 하고, 예술가 스스로 돌파구를 못 마련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원이 끊기거나 최소한의 관객을 모으는 등의 활동을 못 하게 되니까 이런 상황들이 더 극명하게 드러났다. 인터넷 짤 중에 인디 공연장의 코로나 전후를 비교한 게 있다. 관객 3명이 있는데, 이전도 이후도 똑같다. 지역예술의 현실과 비슷하다. 그런데 대구시가 코로나로 예산을 모아 기본소득처럼 나눠줄 때, 제일 빨리 깎는 게 문화예술 관련 지원금, 보조금이었다. 없어도 되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되니 ‘우리가 원래 시장성이 없었구나’, ‘우리가 되게 무의미한 존재인가’라는 깨달음이 왔던 것 같다.
안태호 : 코로나라는 상황과 그에 대처하는 정책이 예술가들의 자각을 일깨웠다는 이야기인가. 슬픈 이야기다.
한상훈 : 긍정적으로 보면 그것 때문에 다른 모색을 해 봐야겠다라고 고민하는 분들이 있었다. 물론, 생존을 위해 예술을 그만두는 분들도 좀 있었고. 원래 브라질타악을 하던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브라질타악은 철저하게 워크숍을 통해서 사람을 모아내야 하는데 이게 안 되니까 영상업자로 변해야 되겠다고 해서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영상을 찍을 줄 알았던 거다. 그걸 나쁘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또, 공공에서 운영하는 공간들은 충분히 운영이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무조건 폐쇄하는 상황이다 보니, 대구의 음악창작소 같은 경우 저렴하게 인디밴드들이 녹음할 수 있는 곳인데 전면폐쇄되어 활동이 안되고는 했다. 지원금보다는 예술의 공공서비스에 의해 지탱되는 부분이 많았고, 공공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따라가는 게 많았는데 코로나가 터지니까 공공은 그걸 책임지지 않더라. 오히려 민간에서는 자기들이 책임질 부분이 있는 곳들은 운영을 했다. 그런데, 행정이 가리킨 손가락을 따라갔다가 더 힘들어지거나 또는 행정이 최소한의 서비스를 유지하지 못하고 국가지침으로 전면 폐쇄가 되서 활동이 중단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많았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우왕좌왕하다가 한 해가 통째로 없어졌다고도 한다. 활동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닌 그런 해가 된 거다.
안태호 : 개인적인 변화는 어땠나.
한상훈 : 개인적으로는 솔직히 말해서 좋은 게 많았다.
안태호 : 기회가 많아졌다는 뜻인가?
한상훈 : 예를 들어 문화재단에서 지원받은 사업은 원래 많이 변경하지 못 하게 되어있다. 재단이 정한 가이드 안에서 이루어져야 되는데, 코로나 덕분에 행사를 상당 부분 바꿔서 교부신청을 내도 되는 거다. 공공의 가이드라인을 지키자니 유의미한 게 30%이고 무의미한 게 70%인 행사를 기획해서 행사를 땄는데, 80% 이상을 유의미한 내용으로 바꿔도 수용이 됐다. 예전 같으면 받아들여지지 않고 심한 간섭이 있었는데 이게 바뀐 거다. 그래서 농담처럼 ‘코로나가 나의 대안인가?’ 하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안태호 :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어떤 건가.
한상훈 : 예를 들어 2·28학생의거와 국채보상운동을 대구의 주요한 정체성으로 보고 ‘대구시민주간’과 ‘시민의 날’로 선정하여 행사를 한다.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근데 지금까지는 계속 관변행사로 흘러갔다. 이번에 제안했던 건 이건 대구 직접 민주주의 역사이고 거리와 광장의 역사이기 때문에 그 기록들을 아카이빙 하는 것이었다. 명목이 아카이브였지만, 원래는 그렇더라도 보여주는 행사를 했어야 됐다. 예산은 적어도 공연도 하고 했어야 되는데 아예 아카이빙 하는 행사로 바꿀 수 있게, 리서치 중심으로 갔다. 당시 대구에서 만들어지거나 했던 거리와 광장의 노래들을 모아서 음원으로 내는 방식이었다. 이전에는 이게 안 됐을 텐데, 올해는 그냥 오케이가 됐다.
안태호 : 아무래도 사람들을 모아놓고 밖에서 공연하는 게 어려운 상황이니까.
한상훈 : 원래 재단은 몇 명이 와서 문화 향유를 제공받았느냐를 기준으로 삼는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오히려 더 좋은 작업을 할 수 있게 된 거다. 있던 노래를 겨우 부르던 것에서 더 나아가 새로 편곡도 하고 발굴도 해서 노래를 만들고 하는 일들이 가능하게 됐다.
안태호 : 불필요한 쇼잉이라는 것들을 좀 줄이고, 실제로 리서치나 본질에 집중할 수 있어서 밀도를 높일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다른 예술가들과의 활동양상은 좀 어땠나?
한상훈 : 많은 사업들이 한동안 멈춰서, 예술가들이 만나서 머리 맞대고 어떻게 할 건가 논의를 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예전에는 예술가들이 사업에 대해서 주로 얘기했다면, 올해는 자기 고민들을 심화시키며 정서적인 불안을 나눴던 경험을 했다. 전에는 ‘노래할 수 있냐’, ‘언제는 시간 되냐?’ 그런 이야기들만 했었는데, 올해는 자기의 불안이나 고민들을 많이 나눌 수 있었던 게 좋았다. 내 욕망이 아니라 떠밀려 왔던 시간들을 돌아보며, 자기 욕망을 좀 더 들여다보게 된 게 예술가들한테 플러스가 아닌가 싶다. 물론 경제적으로는 무척 힘들었다. 예술가도 예술가지만, 음향을 하거나 장비를 다루는 분들은 빅 이벤트들이 사라지니까 큰 고통을 받았다. 예술가들의 경우 인정 욕구가 있는데, 관객 없이 온라인 공연을 하면서 자괴감이 더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안태호 : 예술가들이 만나서 정서적 교감을 하거나 처지를 나누면서 증폭되는 지점들이 있었다는 말인데,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달라.
한상훈 : 이전에는 예술가가 ‘몇 번 공연을 뛰면 얼마를 번다’는 감을 가지고 사업을 하며 네트워크 없이 그냥 하는 경우가 많았다면, 올해는 몇 개의 사업만 남으니 거기에 집중을 하게 됐다. 물론, 금전적으로는 손해다. 그래도 서로를 잘 아는 네트워크가 더 단단하게 생겼다. 이런 고민들을 계속 안고 있는 사람들은 이번에 더 크게 자기 내면이나 상황을 직시하고 고민하게 된 것 같다. 특히 제가 만난 친구들 중에는 그런 청년 예술가들이 많았다.
안태호 : 코로나 때문에 활동이 전년과 다를 수밖에 없는 지점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좀 더 생각하는 부분은 어떤 건가.
한상훈 : 농담처럼 활약가라고 직함을 썼던 이유가 그런 거다. 민예총 활동을 하고, 관하고 민예총 처장으로 만나고 했을 때, 어떤 새로운 일을 하거나 변화를 이끄는 일을 한다는 느낌이 사라진지 오래됐다. 코로나와 블랙리스트, 문화계 성평등 문제 등을 대응해 보니 이게 그냥 일반적으로 늘 해오던 1년 사이클로 돌아가던 활동으로 유의미한 일을 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 스스로 고민이 들었다.
안태호 : 단체나 조직이라는 게 갖는 관성에 대한 성찰이 있었다는 얘긴가.
한상훈 : 그것도 있고, 말하자면 어떤 신호들이 온 거다. 코로나로 인해 지역예술의 위기가 더 극명하게 보인 것, 블랙리스트 때문에 행정에 끌려가고 있는 예술 현실, 이런 신호들이 있었는데 몸이 무거우면 못 움직인다. ‘지금 상황이 그런 상황이구나’라는 신호가 많이 보였던 것 같고, 근데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답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많이 인지하게 됐다. 좋든 나쁘든 시스템 자체가 거기에 대해 누가 자극을 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다. 한국 전체를 봐도 그렇고, 특히 지역은 더 그렇다. 그런 것들에 대해 지역에서 돌파구를 낼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라는 회의적인 생각도 많이 들었다.
안태호 : 코로나 판데믹이 역설적으로 그런 충격을 주거나 본질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는 말이겠다.
한상훈 : 그렇다. 안개가 싹 걷힌 느낌. 되게 미학적인 비평을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분들이 구조적인 대안에 대한 얘기를 전혀 하지 않는 시대라는 느낌도 많이 들었다.
안태호 : 경제적 차원에서는 어땠는가.
한상훈 : 원래부터 벌이가 안 좋아서, 조직을 그만두고 오히려 수익이 더 좋아졌을 수 있다. 민예총 급여라는 게 3년 전만 해도 최저임금이 안 됐다. 그 뒤에 한 2년간 최저임금 받고, 그만뒀다. 일단 실업 급여를 한동안 받았는데, 실업 급여 받을 때 실업인증을 하는 게 코로나 때문에 쉬워져서 혜택은 좀 받았다. 그거 말고는 프리랜서처럼 잡다한 일을 하다보니까 수입은 더 좋을 수도 있을 거다.
안태호 : 대구의 다른 예술가들은 어땠나?
한상훈 : 대부분 수익이 많이 줄어든 건 사실이다. 실연하는 분들도 그렇고 행정에서 하는 큰일들을 맡는 사람들, 축제 시스템을 계속 하던 분들은 좀 고생을 많이 했다.
안태호 : 그렇다면 코로나 정국에서 예술가들은 시민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나. 대구는 사실 시민사회나 생활의 체감이 압도적으로 더 클 것 같은 느낌이다.
한상훈 : 그런 부분도 있다. 예술가들은 의외로 아메바 같은 생명력이 있더라. 코로나 대응 활동을 하는 사람들 중에 예술가들도 한 축을 차지했다. 노래하는 이종일 선배가 마스크를 만들어 나눠주는 역할을 하니까 연극하는 현순 선배와 극단 사람들이 같이 가서 활동을 함께 했다. 연극 소품들을 그렇게 만들곤 했으니까 익숙한 일이었을 거다. 시 쓰면서 목수 하는 조기현 선생 같은 경우 코로나로 인해 노숙자나 이런 사람들한테 도시락을 못 나눠주는 상황이 됐을 때, 성금을 걷어 도시락을 나눠주는 역할을 했다. 대구 코로나 상황이 심각할 때 전국 민예총에서 돈을 보내줬는데 그런 단체들에 보냈다. 결혼 이주 여성들 중에서 애가 있는 미등록 여성들의 경우 마스크도 지급이 안 되었다. 마스크나 애기용품 같은 걸 사서 지원하는 것들도 함께 하면서 우리 사회 안에 계급적 구조가 보이더라. 어떤 사람들이 위기가 왔을 때 가장 먼저 위험에 처하는지가 특히 대구에서는 극명하게 보였다. 거기에 민예총 계열, 또는 진보적 예술인들이 빨리 감응하더라. 그 사람들과 만났던 경험이 있으니까 가능했던 일이다. 연극교육으로 미등록 이주 여성들을 만나기도 했고, 장애인이나 노숙자를 봤던 경험이 있으니까. 예술가들이 우리 사회 안에서 위기 계층들하고 만났던 경험들이 빨리 행동하게 하는 계기가 됐던 것 같다. 예술가의 쓸모 중의 하나가 그런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태호 : 앞에 잠깐 브라질 퍼커션(타악)을 하던 분이 다른 걸로 업종 전환을 모색했다고 했는데, 그렇게 활동 형태가 달라진 분들이 또 있나?
한상훈 : 인디밴드 하는 한 친구는 EBS <스페이스 공감>에서 슈퍼 루키가 됐을만큼 실력이 있는 친구인데, 패브릭아트 같은 것도 한다. 아직 전환을 한 것은 아니지만, 노래를 그만하고 패브릭아트를 메인으로 할까 하는 고민을 하더라. 그건 팔 수가 있으니까. 이런 상황은 코로나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껏 좌충우돌하며 여기까지 성장해 왔지만 다음 언덕이 있는지 없는지 잘 발견하지 못한 프런티어들의 고민이기도 한 것 같다. 브라질타악을 하는 그분도 정말 실력이 좋다. 축제 등에 섭외하면 항상 대박 나는 아이템이기도 하고. 다 좋아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분이 자기가 개척자니까 갖는 어려움이 있다. 나이가 거의 마흔이 되거나 본인들이 결혼하고 계속할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던 사람들이 좀 그런 고민을 가졌던 것 같다.
안태호 : 계속 그 활동을 했어도 올 고민이었는데, 코로나가 그걸 당겼다고 볼 수 있겠다.
한상훈 : 특히 다원예술 분야가 그랬다. 정책적으로 안정적인 지원을 받을 수 없고, 아카데미 카르텔 안에서 교수님이 끌어주지 않는 사람들. 자기 스스로 분야를 개척해야 되는 사람들한테 코로나라는 게 더 절망적으로 다가온 것 같다. ‘내가 하는 예술로는 계속 생존할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예술이라는 게 꼭 대학을 통해서 학술적으로만 얘기될 수 없는 거라고 본다. 필드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있지 않나. 그런 점에서 나처럼 기획을 하는 이에게 그 예술가는 소중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일수록 더 타격이 있었다. 우리 정책이라는 게 아직 그렇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분들은 예술가 등록하기도 어려운 경우가 자주 있다. 장르 안에서 봤을 때 창작을 했느냐? 공연장에서 했느냐? 이렇게 했을 때 힘든 조건이기도 해서 예술인복지재단의 영역 안에서 수용이 안 되는 부분이 있는 분도 많았다.
안태호 : 코로나를 계기로 해서 예술인 등록을 하려는 움직임이 더 많아진 측면도 있나?
한상훈 : 그것도 있고, 대구예술인지원센터가 올해 처음 생겼다. 거기 업무가 등록된 사람을 대상으로 하니까 좀 늘어난 측면이 있다. 이전까지 대구는 스킨십이 별로 없었다. 특히 센터가 대구에 코로나가 강할 때 처음 생겼으니까, 홍보가 좀 됐다.
안태호 : 재단도 코로나랑 예술인 복지 관련한 일을 하면서 훨씬 더 스킨십도 많아지고, 지역하고 그런 관계들도 늘어났다는 이야기인가?
한상훈 : 그렇다. 대구문화재단이 경영평가가 한동안 높았다. 왜냐면 정산을 빡빡하게 받아서, 예술인들을 많이 괴롭혀서 평가가 좋았다. 중간에 대구문화재단에 문제가 생겨 본부장이 중도하차하는 스캔들이 있었다. 그 상황 이후에 재단도 쇄신을 하려는 중이었고, 이런 일이 터지니 조금 더 예술가들과 친화적이 됐다. 이전까지 예술가한테 갑을관계로 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은 조금 더 부드럽게 다가가는 측면이 있다.
안태호 : 코로나 이후에 실제로 예술가들의 등록이나 긴급지원들을 보면서 그런 지향성이 더 생겼는지 확인해 보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올 수도 있겠다.
한상훈 : 대구예술인지원센터가 대구에 코로나가 크게 터지면서, 예술복지재단 사업 중 일부를 가져와서 운영했다. 사업참여를 위해서는 예술인 등록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안내가 많았다. 그것 때문에 많이 늘었을 거다. 작년만 해도 예술인 등록이나 활동 증명이라는 걸, 뭔지 몰랐던 사람이 엄청 많았는데, 지금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됐다.
안태호 : 대구문화재단에서도 코로나19 관련 사업들이 있었을텐데, 어떻게 진행됐나.
한상훈 : 코로나 사업들이 8, 9, 10월에 시작되고 11월 안에 정산을 끝내야 하는 사업들이 많았다. 그걸 딴 친구들이 이걸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 ‘따긴 땄는데 시간이 너무 없다’, ‘그 안에 결과물을 내야 되는데 어떡하지’, 이런 친구들이 꽤 많이 있었다. 아직도 다 급하게 하고 있을 거다.
안태호 : 주로 프로젝트 베이스였다는 이야기다.
한상훈 : 그렇다. 자유도가 있는 프로젝트들.
안태호 : 상대적으로 자유도는 높았지만 어쨌든 실행결과를 내야 되는 상황이니까.
한상훈 : 그렇다. 또, 폐단이라고 한다면 온라인 영상으로 바꾸라고 했을 때, 예술단체들이 홍보비용을 안 쓰고 실연자 위주로 가다보니까 그냥 영상을 찍는 거다. 제대로 찍는 게 아니고. 그렇게 하고 끝내니까 보지도 않고, 본인들도 이걸 한 건지 만 건지 중복되는 열패감이 있지 않았나 싶다.
안태호 : 영상 관련한 촬영이나 온라인 지원 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한상훈 :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사무국장에게 영상활동가들이 가이드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했다. 영상을 맡기는 쪽이 영상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너무 없어서 터무니 없는 요구들이 많았다. 영상을 요구하는 예술가들의 이해가 높아지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아지는 작업환경과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안태호 : 주변에서 영상화한 작업들을 본 적이 있을텐데, 어땠나.
한상훈 : 인내심이 없으면 평균 10분 이상 보기 힘들다. 우리가 그래미 시상식은 눈이 빠져도 보지만, KBS <뮤직뱅크> 같은 프로들은 잘 안 보게 되지 않나. 좋은 관람 환경이 있으면 모르겠지만, 노트북이나 모바일에서는 오래 못 본다. 제작 노하우를 가진 훌라 같은 팀의 ‘문화가 있는 날’ 뮤직 비디오 클립 같은 영상물은 볼 만한데. 그냥 쭉 보여주는 그런 송출들이 많았으니까.
안태호 : 원테이크나 롱테이크로 한 큐에 찍으면 지루해서 못 보는 이치다.
한상훈 : 카메라 1대밖에 못 부르는 비용으로 하다보니까. 영상화에는 고민이 많아야 하고, 연출자도 2명이 필요하다. 극을 연출하는 사람도 있지만, 영상도 연출자가 한 명 붙어야 되는 상황이다. 그래서 오히려 매칭을 사업화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예를 들어 연극을 만들어야 되는데, 이 연극을 영상화하는 사람도 지원 베이스를 만들어서 두 팀이 같이 고민해서 만들게 하면 효과가 있을 거다. 그런데, 그냥 실연자들에게 주니까 일단 본인 출연료를 제하고, 남은 돈이 있으면 ‘영상 중에 할 만한 애 없냐?’, ‘제 사촌동생이 하는데’, 이렇게 부르는 분위기가 좀 있었다. 관공서의 경우도 전시를 찍어야 되는데 ‘20만원 받는 사람이 없냐’,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니까 제대로 된 업체는 절대 안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아마추어를 쓰고 영상이라는 게 그냥 결과보고용으로만 나오는 경우가 많다. 영상을 하게 하려면 영상을 할 수 있는 문화산업 베이스의 지원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그게 나중에 강화된 콘텐츠가 될 수 있는거다. 디지털산업진흥원 같은 곳에서 영상산업 종사자들과 함께 콘텐츠를 만드는 실험들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안태호 : 최근에는 공연 쪽에서 온라인 상영의 유료화 이야기가 나온다. 지역에서는 여기에 대한 판단이 어떤가.
한상훈 : 힘들다고 본다. 영상 콘텐츠화는 더 냉정한 것 같다. 유튜버처럼 생활에 밀착한 내용을 하지 않는 이상 공연 콘텐츠를 영상화 한다는 것은 공연예술 자체에다 영상이 또 예술로 붙어야 되는 거다. 기본적으로 큰 자본이 없이는 어렵다.
안태호 : 어쨌든 예술 자체의 퀄리티도 문제겠지만 영상기술이 접합되는 것도 훨씬 더 퀄리티가 있어야만 경쟁력이 생긴다는 이야기인가?
한상훈 : 그렇다. 그래야만 본다. 대구에는 독립영화 전용관이 있으니 그쪽에서 아예 지역 아티스트 공연들을 틀어주면 어떨까 생각해봤는데, 그래도 안 보겠지 싶다. 대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자기들의 노래 가사나 이런 것을 책으로, 독립출판으로 낸다든지 하는 시도들을 상상해볼 수 있지 않겠나. 비대면으로 할 수 있는 게 꼭 영상 작업만은 아니다. 다른 식의 결과물을 내보고 다른 길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미술하는 분들도 갤러리에서 계속 전시하는 게 힘들면 굿즈를 만들듯이 자기들의 상품들을 다르게 만들어본다거나 그런 것들을 시도하고 지원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실패해도 되는 비대면 사업들, 그러나 이 사람들이 하고 싶은 사업을 좀 해보면 괜찮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안태호 : 올해 대구에서 비대면 사업들 중에서 눈에 띄는 것들이나 직접 경험해 본 건 어떤 게 있을까?
한상훈 : 일단 아까 얘기했던 음반이 있었다. 그리고 대구단편영화제 개막식 축하공연을 하려고 했던 지원사업이 있었다. 그런데 개막식을 못하게 되니 사업을 바꿨다. 대구에서 만드는 독립영화들이 대부분 기존의 음악을 쓰는데, 대구 인디밴드랑 매칭해서 영화음악을 만드는 것으로 4팀을 연결시켰다. 어차피 대면하지 않아도 되는 영화인데, 그 영화의 음악을 만드는 일을 한 거다. 공연은 아니지만, 다르게 관객을 만나는 일이다. 이런 일들이 좀 많아졌으면 좋겠다.
안태호 : 공연하는 게 불가능하니까 아예 그렇게 연결을 해서 새롭게 사업들을 꾸렸다는 이야기다. 재단에서는 그걸 유연하게 받아준 건가?
한상훈 : 그렇다. 재단에서는 요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원금 포기 안 한다고 하면 진행하라고 한다. 내용을 완전히 바꿨는데 괜찮을까 싶었다. 그런데, 오케이가 난 거다.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코로나가 대안이었나 싶은 생각마저 든 거다. 진작에 이렇게 했다면 얼마나 좋았겠나.
안태호 : 온라인 포함해서 비대면 예술활동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한상훈 : ‘언리미티드 에디션’이라는 독립출판 축제가 있다. 올해는 온라인으로 진행했는데, 매출은 좀 오른 것 같더라. 네트워크는 좀 아쉬웠다. 전에는 책보다 사람 만나는데 집중을 했는데, 쇼핑몰처럼 만드니까 사람들이 책을 보고 구매로 이어지더라. 꼭 성공이라 하기에는 좀 애매하다. 그래도 직구가 아닌 변화구였지만 유의미한 전략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유의미한 변화에 대한 연구들은 더 있어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온라인 콘텐츠화라는 것을 일차적으로 했을 때는 너무 폐해가 많아서 그걸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안태호 : 코로나로 인한 주변의 아티스트들의 사회적 관계 변화는 어떤가?
한상훈 : 사회적 관계 변화는 좀 회의적으로 된 사람도 있지만, 좀 더 끈끈한 부분도 있었던 것 같다. 서로를 걱정하는 마음도 있고, 활동에 대해서도 관객이 없다보니까 자신의 활동이 유의미한가에 대해서 한 번 더 보게 되는 부분도 있었다.
안태호 : 그 부분이 크게 느껴진다. 아까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예술가들이 자기 작업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어떻게 보면 자기 인식이 강한 사람들이다. 그게 단절 됐을 때 어떤 느낌을 갖는지, 혹은 거기서 어떤 갈증을 갖는 지가 크리티컬한 지점인 것 같다.
한상훈 : 맞다. 내가 하는 활동이 제대로 된 건가를 더 자세히 보는 시간이었다. 일부는 자신이 없다는 생각에 전환을 고민한다. 그전 같으면 몇 년을 더 버티고 갔을 일을 빨리 캐치하게 된 것이다. 반면에 더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도 꽤 많이 있는 것 같다.
안태호 : 코로나 이후에 예술활동은 어떻게 변할까. 혹은 어떤 게 분기점이 될까?
한상훈 : 아까 얘기했던 원래의 안개가 걷힌 효과들이 있다. 아마 코로나가 끝나면 그대로 복원은 되겠지만, 그 전에 있었던 그 문제들을 그냥 수면 밑에 둘 것인가라는 논쟁이 촉발됐으면 한다. 특히 지역예술의 문제가 그렇다. 지역에 매체가 없기 때문에, 대부분 수도권에 있었던 예술담론을 수용하는 지점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그 외에도 블랙리스트 이후에 예술인들이 같이 뭉쳐서 정책에 대해 핸들링을 못하는 게 경쟁하는 지원체제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A와 B 단체가 지향이 비슷해도 A가 지원을 받으면 B가 못 받기 때문에 서로 흩어지는 게 있다. 그래서 처음 예술단체가 돼서 지원을 받거나 할 때는 기획서로 평가하겠지만, 오랫동안 예술활동을 한 곳 같으면 창작지원금을 기본소득처럼 나눠줘서 이걸 밑작업으로 창작을 하고 시장에서 승부를 보는 체계로 가면 좋지 않을까 싶다. 기본적으로 창작이 가능한 예술가 증명이 됐다고 하면 기본 기금을 주는 것으로 하는 거다. 거기서 더 나은 기획을 하면 후에 지원을 하더라도, 지금처럼 서로 경쟁하는 구조보다는 기본 창작금 같은 것들을 주면 어떨까. 그러면 예술가들 안에서도 네트워크를 가지고 논의를 통해 행정에 역제안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행정이 리드해서 채워나가고 예술가들이 따라가는 그 구조가 너무 오래됐고, 그게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안태호 : 개인적으로는 판데믹 이후로 어떤 것들을 준비하고 있나.
한상훈 : 대구에 문화예술 정책 연구를 하는 팀들은 거의 다 대구시가 뮤지컬 축제하고 싶으면 축제할 수 있습니다는 보고서를 써주고, 뭐하고 싶으면 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식이다. 그래서 시책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내는 정책 그룹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지역예술이, 특히나 다원예술이나 독립예술이 자기 기록이 별로 없다. 유의미한 활동을 했음에도 ‘우리 유의미한 활동을 했습니다’라는 기록이 없는 거다. 그러다 보니 ‘내가 잘 가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큰 단체들은 쓸데없는 행사를 해도 기록이 남는다. 도록도 내고 예산이 있으니까. 그래서 지역예술 아카이빙과 의미화 작업 같은 것들을 하면 좋겠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용기를 좀 가지지 않을까. 꼭 비평가들을 쓰는 방식이 아니더라도 서로 봐주는 것도 필요하겠다.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
▲ 한상훈 인터뷰 워드 크라우드
안태호
한국문화정책연구소,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이사, 웹진 예술경영 편집장. 민예총 활동가를 시작으로 웹진 ‘컬처뉴스’ 편집장, 부천문화재단, 제주문화예술재단 팀장 등을 거쳤다. 함께 쓴 책으로 <나의 아름다운 철공소>, <노년예술수업> 등이 있다. 스무 살 무렵 빼어난 재능들에 주눅 들어 창작에서 도망친 후, 예술 동네 근처에서 얼쩡거리며 문화정책과 기획 관련 일을 해왔다. 장르를 가리지 않는 왕성한 문화 소비자가 꿈이며, 여전히 만화를 보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