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안내

문화현장기록

류연복

'목판화와 사회 운동에 주력 중인 남성 작가'

  • 인터뷰이 류연복(판화가, (사)경기민족미술인협회 회장)
  • 인터뷰어 은영준(독립/문화연구자)
  • 2020년 11월 19일
  • 류연복 작가 자택

작가는 자신의 철학과 사유를 작품을 통해 표현하는 존재다. 이 정의에 입각할 때, 우리는 작가란 명칭과 그 범위가 단순히 예술품 제작자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선생이라는 존재가 나보다 생물학적으로 앞서 태어난 이나 교사의 존칭을 뜻하지만은 않듯이 말이다. 이런 면에서 류연복은 단순한 기술자가 아닌 작가적 삶을 살아왔다. 그는 독재와 불의에 투쟁과 저항으로 맞섰던 1980년대를 온몸으로 느끼고 이를 목판화, 걸개그림, 벽화 등의 작품에 녹여냈다. 하지만 서슬 퍼렇던 시절이다 보니 이 과정에서 여러 고초를 겪기도 했다. 여기에는 1986년 자신의 집 담벼락에 벽화 <상생도>를 그렸다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되고 구치소 생활을 했던 일화 역시 포함된다. 이처럼 역사의 부름에 그는 민중미술로 답했다.


목판화는 제작 및 전파가 용이하고 효율적이기에 한국 사회의 엄혹한 시대상을 비판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곤 했다. 본래 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류연복이 목판화를 제작하게 된 연유에는 이러한 시대적 요청과 목판화의 특성이 한몫 했을 것이다. 그는 축자적으로든 비유적으로든 저항성과 운동성을 담은 칼을 휘둘렀던 작가다. 류연복의 1980년대 작업은 권력과 길항하는 관계에 놓였던 존재들의 목소리를 증언한다는 면에서는 따뜻하지만, 동시에 저항과 투쟁의 역사를 날 것 그대로의 전투적 직선으로 드러냈기에 거침없기도 하다.


미술평론가 김진하는 류연복의 1980년대 작업을 두고 “류연복 목판화의 뼈대”가 되는 시기라 평한 바 있다. 뼈가 인간 신체의 기틀이듯이 류연복의 초기 작업은 그가 36년간 지속해온 목판화 작업의 골자를 이룬다. 뼈가 각종 장기나 근육들을 지지하고 보호하며, 근육 수축 시 지렛대 역할을 담당하고, 동시에 혈구 세포를 생성하고 무기질을 축적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가 처음 나무를 파냈을 때부터 담아냈던 정신은 그가 밟아온 궤적과 근래의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그는 수십 년간 ‘약동하는 존재들’을 목도하며 사유했고 이를 장쾌하면서도 섬세한 칼질로 빚어냈다. 그의 칼은 박종철, 이한열, 6월 항쟁은 물론이고 낮은 곳에 머물고 있는 존재들의 기운, 발과 몸으로 그려낸 풍경, 가슴으로 더불어 나누며 사는 삶을 증언하고 기록하는 도구였다.


상술했던 류연복의 궤적은 목판화 작업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칼과 나무로 세상을 관조했던 자신의 작품을 벗으로 삼아, 이웃과 나누고 연대하는 삶을 실천하며 살아왔다. 서민들도 단돈 오천 원으로 미술 작품을 살 수 있게끔 펼쳤던 1985년의 ‘을축년 미술 대동잔치’는 그가 추구했던 ‘미술의 민주화’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쌀과 판화를 바꾸자던 한 농민단체의 말에 기뻐했던 일 역시 그가 추구해온 예술을 방증하는 일화가 아닐까. 인터뷰에서 류연복이 자신에게 미(美)란 개념이 많은 이들이 나눠 먹을 수 있는 큰(大) 양(羊)과 같은 것이라 말한 이유는 그가 그러한 미학을 삶 속에서 전개해왔기 때문일 테다.


이처럼 넉넉히 나눌 수 있는 아름다움을 지향한 류연복의 미학은 그가 안성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1993년을 계기로 한층 더 구체화 된다. 1993년 전후는 한국 사회에 새로운 국면을 초래했던 동구권의 붕괴와 문민정부의 등장 사이를 가로지르는 분기였다.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민중, 민족, 해방, 통일 등의 개념은 시효를 다해가는 것으로 여겨졌고, 프로파간다적 판화를 찍어내던 적지 않은 민중미술가들은 회화 등 자신들의 ‘본업’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이때 류연복은 도리어 넓은 나무 판면의 본질과 목판화의 동시대성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는 목판화만이 드러내는 특유의 운동성과 미학이 여전히 유효하리라고 보았다. 나아가 그는 예술 작품 속에 담긴 운동성과 미학을 자신이 딛고 있는 안성이라는 지역에서의 운동으로 현실화했다.


실제로 류연복은 새로이 옮긴 터전인 안성에서 각종 지역 운동을 주도하거나 이에 참여했다. 그는 폐교 예정에 처한 학교를 살리기 위해 예술 행사를 여는 등 앞장을 섰고, ‘안성천 살리기 시민모임’ 공동대표와 ‘안성맞춤 의제21’ 공동의장 등을 맡으며 바삐 뛰었다. 그중에서도 특기할 운동으로는 안성의료소비자생활협동조합(現 안성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설립과 운영에 참여했던 것을 빼놓을 수 없다. 류연복은 조합 설립 기금을 모으기 위해 전시회를 열고, 설립 후에는 이사와 조직기획위원장으로 활동하는 등 ‘안성의료생협’의 탄생에 힘썼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안성의료생협’이 바로 한국에서 최초로 등장한 ‘의료생협’이었다.


인터뷰를 진행하기 위해 류연복 작가로부터 전달받은 그의 자택 주소는 안성종합버스터미널에서 택시로 약 20여 분 이상을 이동해야 하는 외딴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평소 류연복은 각종 매체를 통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안성으로 근거지를 옮긴 자신을 민들레 홀씨에 비유하고는 했는데, 나에게는 그의 자택 주소가 마치 바람에 희미하게 날아가는 홀씨와 같이 느껴졌다. 분명 일러준 곳에 도착했음에도 그의 집으로 가는 길이 도통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말이다. 눈앞에 집의 형상을 한 건축물은 보이는데 그의 집으로 향하는 방법을 알 수 없어 발을 동동 구르던 도중, 다소 근거리에서 넉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류연복 작가의 목소리였다.


멀리서 안내해주는 그의 목소리를 따라 나는 작은 나뭇가지들을 헤치고 도랑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물줄기를 건넜다. 우여곡절 끝에 대면하게 된 류연복 작가는 수더분한 말투로 지도 어플리케이션만 보고 오다가 나와 같이 엉뚱한 곳에 들어선 사람들이 왕왕 있다고 말했다. 이런저런 인사를 나누고 인터뷰를 시작하자, 그는 차분하면서도 경쾌한 높낮이로 나의 질문에 답했다. 그는 부드럽고 순박한 표정을 내보이면서도 코로나19와 예술가들의 삶과 창작활동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묻는 나의 말에 시종일관 간결하고 명쾌하게 답변했다. 그에게 코로나19는 지금까지 인류가 살아왔던 삶의 방식들이 배태한 인재(人災)였다.


아마 류연복의 이러한 대답은 그의 방대한 작품과 삶의 궤적이 낮은 곳에 머무르고 있는 존재들과 분리될 수 없기에 나온 것일 테다. 현재 그는 전 지구적 질병 속에서도 일상을 이어가고 있는 인간 군상을 표현하고자 나무와 칼을 준비하고 있다. 작가의 평범한 하루다.



류연복은 목판화와 사회 운동에 주력 중인 남성 작가다. 1958년에 태어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10·26 사건, 12·12 군사반란, 그리고 광주라는 시대적 사건을 지나오며 민중미술 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그 과정에서 판화, 벽화, 걸개그림 등 다양한 장르 속에 시대정신을 담고 불의에 항거했다. 현재는 지역 예술 운동을 시도하고자 옮긴 거처인 경기도 안성에서 27년 동안 판화를 비롯한 다양한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또, 안성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안성천살리기시민모임, 푸른안성맞춤21, 자치안성신문 등 여러 시민조직에 참여하기도 했다. 2019년에는 판화가로서 35년의 역사를 정리하는 전시회인 “온몸이 길이다”를 열었다. 현재 (사)경기민족미술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1. 회고 및 결산

은영준 : 지금까지의 예술활동과 이에 대한 소회를 말해주실 수 있나.


류연복 : 작년에 35년을 결산하는 전시를 했다. 그때 그런 얘기를 했다. ‘어쨌든 미술가의 삶으로 월급을 받아본 적 없이 35년간을 견뎌왔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가 기특하게 생각한다’라는 얘기를 인사말에서 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80년대 초반에 대학 졸업을 했다. 우리가 대학 졸업할 때는, 남한사회가 독재 대 민주, 이런 식들의 대립관계들이었다. 문화나 미술도 소위 말하는 미술만 아는 자들,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 이런 구분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림과 미술, 대중들과 소통할 수 있는 미술이라는 건 어떤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해왔고, 예술활동을 해왔는데 하다 보니 35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거다.


은영준 : 최근에는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류연복 : 80년대부터 블랙리스트였다. 민미협, 즉 민족미술협의회라고 하는 제도권 바깥의 미술단체, 예술단체를 만들어서 사무국장도 했다. 당시에는 안기부, 보안사, 이런 데서 주요 인사들을 사찰 대상으로 하고 그랬다. 그것이 《말》이라고 하는 잡지에 폭로가 됐었다. 그때도 내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블랙리스트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해서 별반 놀랍지도 않았다.


은영준 : 과거나 최근 모두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건데, 두 시기 각각에서의 관심사는 좀 다른 편이지 않았나. 다른 인터뷰에서 관념적인 것에 착상했다가 구체적인 것에 대한 관심으로 돌아섰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민족이나 민중 등의 개념으로부터 자연으로 관심사를 전환했다고도 볼 수 있는 건가.


류연복 : 자연이라기보다는 그런 어떤 관념화된 단어들, 민중이니 민족이니, 해방이니 등등의 실체가 명확히 잡히지 않지 않나. 그러나, 어쨌든 그런 것들이 그 당시 담론들이었다. 그런 활동이 이제 지역으로 옮겨 오면서 지역 활동이라고 하는 형태들로 바뀐 것이다. 지역 활동과 예술 활동 중에서 좀 더 예술에 많은 퍼센테이지를 두기 위해 안성에 왔다. 그런 변화된 조건과 환경 속으로 스스로가 지역을 택해서 내려왔던 게 있었고. 나와 지역과 자연이라는 3자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왔던 것이 안성으로 온 이후의 시간들이다.


은영준 : 민중이라는 단어가 시민으로 대체됐다고 할 수도 있지만, 요체는 같다고 볼 수 있겠다.


류연복 : 거의 같은 거다. 그 당시에 여기 내려와서 했던 게 호박 같은 것을 그리면서 화제를 ‘한 뜻 한 길로’로 잡았다. ‘계속 한 뜻 한 길로 간다’라는 이야기들을 그림 속에 담아왔던 것이다. 예전을 직선적 활동 방식이라고 한다면, 호박에서 느껴지는 거는 지그재그로 나간다. 예전이 그런 직진에 대한 사고방식이었으면 지금은 좀 느리게 가지만 유연한 사고방식이 되는 편인 것 같다. 나는 좀 더 본질적으로 들어갔다고 말한다.


은영준 : 안성에는 갑자기 내려오게 된 건가.


류연복 : 아니다. 나는 원래 지역에 가려고 했다. 처음에는 원주 쪽을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80년대 그런 운동들을 해왔던 것 자체도 사회로부터 혜택을 받았다고 본다. 내가 77학번인데, 우리 때는 10~15%가 대학 진학을 했다. 당대 학생들 중에서 10~15%만 간 거다. 요즘의 대학들하고 다른 느낌이었다. 굉장히 지식인적 개념들이 강했던 거다. 그런데 우리집은 부유한 집안도 아니었고 빈한한 집안이었는데, 내가 대학을 가게 됐다. 우리 또래들은 소위 경제 개발 5개년 계획도 있고 해서 시골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왔었다. 밥벌이 때문에 또는 집안 문제들 때문에, 소위 말하는 공돌이나 공순이들이 공장으로 많이 들어갔다. 아니면 남의 집 식모로 들어간다든지. 그게 우리 또래들의 삶이었다. 우리 또래의 삶들이 그랬는데, 나는 어쨌든 대학을 운 좋게 들어가게 된 거였다. 그런 것 자체가 사회로부터 혜택을 받았다는 생각을 한 거다. 그것을 되돌려 줘야 되는 삶이라고 하는 것이고. 보통은 성공한 기업인들만 사회 환원한다고 얘기하지 않나. 나는 나의 재능도, 내가 받은 교육도 그런 개념으로 생각했다. 굉장히 국가주의적 인간이었다. 그런 것이 우리 시대 교육의 형태였다. 국가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것들. 그래서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했던 거다. 더불어 한다고 했는데 그 당시는 환원이라는 말을 더 썼던 것 같다. 우리 집에 벽화를 그린 것도 마찬가지였고. 탄압이 들어왔지만, 기본적인 것들은 그런 생각이었다. 더불어 한다, 미술의 민주화, 미술을 더불어서 나눠 갖는다는 생각. 그런 게 굉장히 아름답지 않나. 나는 큰 하나가 된다는 생각을 한다. 미(美)를 한자로 하면 양 양(羊)자에다 큰 대(大)자를 쓴다. 옛날에는 미라는 게 큰 양이었다는 거다. 큰 양은 많은 사람들이 나눠 먹는 것이고. 나는 미에 대한 개념을 그렇게 파악했다.


은영준 : 이런 삶의 궤적과 그 정신이 안성으로 내려온 1993년 이후에도 쭉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는 것인가.


류연복 : 그렇다. 90년대에 들어오면서 전부들 본업으로 가더라. 회화하는 사람은 회화로 다시 갔다. 이건(80년대 민중미술) 운동성으로 했던 거였다. 나도 내 그림 좀 그려볼까 하고 여기 내려올 때 없는 돈에 캔버스하고 물감하고 사서 왔다. 그때 여기 내려와서 많이 생각했다. 목판이라고 하는 것, 목판 운동이라는 게 아직도 유효한데 왜 전부들 떠날까 싶은 생각이 들더라. 그럼 나라도 지켜볼까 이런 생각도 있었고. 그러면서 나무에 대해 좀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2. 예술활동과 생계

은영준 : 올해 초부터 코로나19, 전세계적으로 대유행하는 전염병이 창궐을 했다. 코로나19 이후의 창작활동에서 어떤 경험을 했었는지 듣고 싶다.


류연복 : 별반 달라진 건 없다. 왜냐하면 예술활동 자체가 80년대에는 집단화된 형태 속에서 할 일들이었다. 나는 그러다 지역에 내려왔고, 지역활동들에 주목을 하다가 다시 세월이 좀 안 좋아져서 남들이 불러 잠깐 나갔던 부분이 있었다. 그것이 30년만에 촛불정국이라고 하는 형태 속에서 만들어진 광화문 미술행동이었다. 이런 활동에는 집단이 함께하는 창작의 형태들이 있는데, 이게 일상적인 형태들은 아니지 않나. 사건이 터졌을 때 뭉치기도 하고 나중에는 흩어지고 그 이후에는 다시 작업장으로 왔으니까. 그래서 뭐, 원래 우리들 삶이라는 게 작업장에서 보통 많은 시간을 보내다가 그런 일들이 있으면 잠깐 나갔다 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코로나가 오건 안 오건 삶의 방식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그리고 내 밥벌이가 무슨 학생들을 가르친다든지, 그런 작업들이 아니었으니까. (목판화가로서 하는 작업이 코로나19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인가) 그렇다.


은영준 : 목판화를 작업하는 과정은 어떻게 되나.


류연복 : 판화는 판이 있는 그림들이다. 목판은 나무가 필요하다. 나무를 캐다가 놓던가 베니어판을 사던가 일단 나무 자체가 있어야 된다. 그 나무에다 그림을 그려야 되는데, 밑그림이라고 한다. 밑그림을 그려서 그걸 판에다 옮겨 각을 해야 한다. 소위 말해 조각을 한다든지 아니면 각을 한 다음에 거기에다 잉크를 묻혀 찍어내는 게 판화의 과정이다. 밑그림, 도판작업, 잉킹 3단계가 판화의 단계들이다. 회화에 비해서는 좀더 과정이 많고 힘이 아무래도 많이 든다. 그림, 회화라는 건 단번에 그려버리면 끝나는데, 이거는 그려가지고 파서 찍어내는 작업까지 가야되니까. 이걸 나무에다 하는 작업을 목판이라고 하는 거다.


은영준 : 제작 이후에 대중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작품을 만날 수 있게 되는지 궁금하다.


류연복 : 보통은 전시를 통해 대중들과 만난다. 전시용 그림들도 있을 것이고, 그 다음에 책 같은 경우 표지라든지 혹은 안에 들어가는 한 컷짜리 그림이라든지 이런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전시나 출판과 같은 형태로 보통 만나게 된다.


은영준 : 작년에 했던 전시에서 작가로서의 삶을 한 번 결산했다고 보면 되는가.


류연복 : 그렇다. 그런 전시였고, 거의 100일간 했다. 진천의 유일한 공립미술관인데, 군에서 운영하는 생거진천판화미술관이라고 판화만 하는 곳이다. 거기서 초청받아서 한 거였다. (10년 만에 했던 전시 아니었나) 맞다. 전시를 너무 자주하는 것도 민폐더라. 전시를 하면 작품을 팔아야 될 것 아닌가. 처음 내려와서는 일 년 반에 한 번씩 했었는데, 그때는 젊었다. 부지런히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은영준 :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전시는 자신의 예술활동인 동시에 생계활동인 것인가.


류연복 : 전시로 생계가 해결되는 친구들은 많지 않다. 자신의 작업을 세상에 공개한다는 의미가 더 크다. 까이지만 않아도 성공하는 거다. 그림 쪽은 그렇다. 왜냐하면 전시 때문에 먹고 사는 사람이 애초에 얼마 안 되니까.


은영준 : 올해 전시회 계획은 따로 없었나.


류연복 : 작년 전시 끝나고 올해 2월에 서울에서 전시를 했다. 그때가 코로나 정국이었다. 초창기였기 때문에 별반 심각하게 격리를 하거나 하진 않았다. 마스크를 쓴 사람도 있고 안 쓴 사람도 있고. 그 당시에는 마스크를 이렇게 매일 쓰게 될지 몰랐다.


은영준 : 전시 외의 경제활동에는 어떤 게 있는가.


류연복 : 나 같은 경우에는 그냥 여기 집에 와서 작품을 사가는 사람도 있다. 술 마시러 와서 술 마시고 얘기하다가 그 사람이 갖고 싶다고 하면 빨리 그거 실으라고 하고, 돈 보내라고 하면 돈 받고. 뭐 그런 일들이 생기기도 한다. 또 나는 나름 해달라는 거 다 해준다. 돈을 주든 안 주든 해달라면 나는 웬만한 건 다 해주려고 노력을 한다. 그런 것들 자체가 어떻게 보면 내가 살아온 삶의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은영준 : 현재 코로나19가 계속 진행이 되고 있지 않나. 코로나19로 인해 어떤 예술가들은 상당히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기도 한다. 본인의 경험이나 주변의 사례 모두 좋으니, 코로나19와 작가의 생계에 관해 말해줄 수 있는지 궁금하다.


류연복 : 뉴딜정책이라고 하나? 오죽하면 국가에서 지자체별로 4억 원씩 지원하는, 작가들 37명을 뽑아 집단을 만들어가지고 한시적으로라도 도와주려고 한다. 도와주는 건 좋은데, 이게 그런 게 있다. 동네마다 37명의 작가들을 뽑으니 미대도 있고, 음대도 있고. 다 다르다. 어차피 나는 거기에 들어가 있지 않지만, 어느 지역에서는 자문위원으로 와 달라고 해서 한 번 자문해 준 경험은 있다. 어쨌든 이게 굉장히 큰 프로젝트다. 4억이라고 하면. 그전까지 프로젝트라고 하면 작게들 책정했었으니까. 석 달 동안에 주가 되는 친구가 180만원을 받고, 보조되는 친구들이 그보다 좀 덜 받고, 마지막 하는 친구들이 90만원 받는 것 같더라. 석 달 정도. 어떻게 보면 석 달이라고 한정되어 있는 거다. 작가들 도와주려고 하는 거는 같은데, 근데 뭐 그런 방식으로 도와주냐는 거다. 몇 개월 동안 일 같지 않은 일을 어쨌든 만들어서 해야되고... 그냥 작품을 하나씩 사주든지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은영준 : 관이 개입해서 공공조형 이런 쪽으로 가는 건가.


류연복 : 뭐 그런 것도 있다. 근데 조형들은 많이 안 한다. 왜냐면 조형성이라는 것 자체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심의도 받아야 되고. 나는 자문할 때 ‘백서식으로 좀 가라’고 했다. 자기들이 활동들을 계속 해왔기 때문에, ‘이때까지 해왔던 것들을 자료화 시켜내는 작업들을 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다. 그만큼 어렵다는 거다. 특히 우리 같은 경우는 전시회를 좀 많이 해도 되고 상관이 없는데, 전시를 하는 친구들 중에도 포기한 친구들이 많으니까. 누군가 보러와야 되는데 보러오지 않는 거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특히 연극 같은 경우는 심할 것이고. 그 다음에 강사들도 그렇지 않나. 아마 그런 친구들이 가장 많은 타격들을 받았을 거다. 미술 쪽도 마찬가지다. 작품 안 팔리는 친구들은 뭔가 그런 식의 작업들, 일들, 프로젝트 작업이든 다른 것들을 해서 수입을 번다. 누구를 가르치거나, 또는 자기가 하는 다양한 것들로 수입이 안 되는 친구들이 대부분 많다. 그 사람들은 굉장히 힘든 거다. 하다 못해 무슨 재난 지원금부터 시작해서 그런 것도, 일반 사람들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예술 쪽도 타격이 심각했다. 코로나 같은 게 그렇지 않나. 어려운 사람을 더 어렵게 만드는 거다. 코로나가 아니었어도 어려웠었는데 더더욱 어려워진 거다.


은영준 : 코로나19로 인해 예술가 지원 사업에 신청한 적이 있는가.


류연복 : 안 했다. 나보다 더 어려운 친구들 하라고. 그런 것도 더 어려운 사람이 했으면 하고 바라는 거다. 물론 옛날보다는 진짜 좋아진 거다. 나도 초창기에는 한두 번씩은 해봤던 것 같다. 경기문화재단에 개인전 한다고. 근데 너무 적게 주고 되게 일이 많다. 그래서 나는 팸플릿 만드는 데 들어가는 돈, 한 번인가 두 번인가 초창기에 받아보고 나서는 안 받았다. 내가 목판대학을 작년까지 한 3년 정도 했다. 목판하는 사람들이 여기 좀 있다. 그 사람들끼리 모여서 후배들 양성한다고 했던 거였는데. 그것도 경기문화재단이 처음엔 좀 지원을 했다. 재단에서 너무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작가들을 키워내는 거니까. 근데 그거 가지고 해결이 안 되는 거다. 처음에 1500만 원을 받았다. 세 번째는 나눠줄 데가 많다고 반으로 깎아서 주더라.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안 한다. 근데 그것도 받는 친구들은 계속 받더라. (그것도 필요한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까) 필요한 사람이 진짜 받았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기술자들이 있다. 뭐든 생기더라. 나도 처음에 한두 번 받다가 이것도 내가 받을 건 아니다 싶은 생각도 들어서, 그냥 나보다 어려운 친구들이 받아라, 후배들이 받든지 하고 놔뒀다.


은영준 : 본인은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나.


류연복 : 나는 IMF 때도 전시했다. 누군가는 ‘IMF인데 전시야?’ 했지만, ‘나는 평상시가 IMF인데 뭘’ 하면서 그냥 했다. 나는 요즘, 나이가 들어 작품들도 좀 더 나간다. 그래서 난 오히려 지금이 더 편하다.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그리고 사람들이 바깥으로 안 나가니까 작업장으로 놀러와서 손님들도 많아졌다. 그리고 나는 힘들어도 힘들다는 소리를 안 한다. 여태까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사실 코로나 정국이라는 게 사람들 못 만나고, 거기서 맺어지는 정서적 문제, 경제적 문제가 제일 크지 않나. 나는 사람들이 더 놀러 온다. 왜? 여기는 청정지역이니까. 그리고 경제적인 것은 늘 그래왔는데 오히려 요즘이 더 나은 것 같다. 나갈 때 귀찮은 정도다. 마스크 쓰고 가야 된다던가, 마스크 잊어버렸을 때 되돌아와야 하는 이런 것들은 좀 있다.


은영준 : 아까 코로나19가 어려운 사람을 더 어렵게 만든다고 말했다. 이런 생각이 판화나 기타 예술활동으로 구체화된 적 있는지 궁금하다.


류연복 : 12월에 《민과사람》전이라는 전시가 있다. 내가 하는 단체가 하는 건데, 그때 아마 그런 그림들이 많이 나올 것 같다. 코로나 정국에 처해진 인간군상에 대한 그림들이 대부분 나오지 않을까 싶다. 그런 작업들을 꾸준히 하는 친구들이 있다. 이렇게 시장판 돌아다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마스크 쓰고 꾸부정하게 돌아가니는 걸 목탄으로 그리는 친구들도 있고. 그래서 아마 내용상으로는 코로나 정국을 대처하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들이 좀 많이 나올 거란 생각이 든다. 나도 마찬가지로 그런 그림들을 할까 싶은 생각이 지금 들기도 하니까. 소위 말해 비대면이라든지 거리두기라는 것들을 표현 한 번 해볼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은영준 : 우문이긴 하나, 그럼 코로나19를 체감하는 건 인간 류연복보다는 예술가 류연복인 건가.


류연복 : 근데 어쨌든 사회적 현상으로 봤을 때는 그런 얘기를 많이 하지 않나. 코로나 정국 이전과 이후의 삶이 달라지지 않겠냐, 라는 얘기들을 많이 하는데. 뭐 그건 늘 있었던 거 아닌가. 핸드폰 나오기 전과 후의 삶이 다르지 않나. 그러한 삶의 변화들은 늘 있어왔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는 질병, 질병이라기보다 이게 옛날의 역병 같은 거다. 일종의 창궐한 역병이다. 조선시대 같으면, 아니 지금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그래도 삶이라고 하는 게 늘 지속되지 않나. 물론 변화하는 지점은 분명히 있을 거다. 조만간 백신도 나오고 하겠지만, 바이러스도 발전해 나가지 않겠나. 이제는 이걸 늘 삶의 한 부분들로 생각을 해야되지 않겠나 싶다. 지난주 토요일인가, 서울에 다른 사람 전시가 있어 올라갔다. 고궁박물관과 경복궁 그리고 인사동에 사람이 꽉꽉 찼더라. 이제는 너무 쌓인 것들도 있는 것 같다. 대부분 마스크는 쓰고 있었지만.

3. 팬데믹 이후의 예술활동과 삶

은영준 : 그렇다면 팬데믹을 기점으로 예술활동은 어떻게 달라질 것이라 보는가.


류연복 : 전시들은 계속한다. 전시들은 하는데, 공식 오픈식은 안 한다. 근데 모일 사람들은 다 모이고, 뒷풀이는 한다. 형식적으로는 바뀐 것 같은데, 내용적으로는 별로 바뀌는게 있겠냐는 생각이 든다. 왜냐면 사람이라는 게 인간들을 안 만나고 어떻게 살겠나. 나는 코로나19 초반에도 그랬던 것 같다. 심각할 때도 그랬고. 촌구석에 있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은영준 : 비대면 예술활동에 대한 생각도 궁금하다. 한 쪽에는 비대면으로 예술활동을 이어가자는 주장도 있고, 다른 한 쪽에는 어떻게 예술활동이 온라인으로 가능하냐는 사람도 있다.


류연복 : 온라인에서 글자 같은 것은 가능할 거다. 근데 그림은 어쨌든 이미지도 중요하지만, 이미지의 세세한 것들을 보는 게 필요하다. 그거를 손바닥만한데 올려서 보라고 하면 볼 것 같나? 나도 안 볼 것이다. 대충대충 보지 않겠나. 아니면 전시 같은 거 좀 안 하면 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작년 전시도 굉장히 오랜만에 한 거다. 한 10년 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것이 있고 안 가능한 것이 있지 않나. 모든 예술활동을 온라인으로 한다는 것도 웃기는 거다. 온라인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들은 가야 될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것들도 분명 있다. 그런 구분점들이 있어야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든다. 예술 안에서도 워낙 넓고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로 해야 되는 거다.


은영준 : 대유행하는 전염병을 맞이한 이후 시민으로서도 할 일이 있을 것 같고, 예술가로서도 할 일이 있을 것 같다. 예술가, 공동체의 구성원, 시민 등 무엇이 되었든 간에 코로나19 이후를 준비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류연복 : 나는 별반 달라지는 게 없을 것 같다. 내가 여기 내려와서 제일 먼저 했던 게 안성의료복지협동조합이란 걸 만들었다. 우리는 지금 부지를 사서 병원을 짓는다. 여태까지 세 살다가 우리 땅에다 우리 건물을 짓는 거다. 우리는 그냥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나중에 세월이 지나 큰 눈으로 봤을 때, ‘아, 이렇게 변했어’라고 누군가 기술할 수도 있다. 눈 밝은 자들은 그걸 예언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글쎄. 그런 건 있더라. 그동안 2.5단계가 됐을 때는 9시에 술집을 못 열었지 않나. 그때는 낮술을 마셨다. 9시가 되면 끝나니까, 일찍 가서 일찍 마시자. 그리고 집에 딱 들어오면 맞았다. 이런 경험, 이제 우리가 낮술을 즐기게 됐구나, 술은 역시 낮술이야 이러면서. 그런데 다시 1단계, 1.5단계 되면서 이제 다시 제한이 없지 않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진 않더라. 특히 동기생들 모임 같은 거 있지 않나. 그런 건 확실히 국가에서 제재를 하니까 많이 안 하더라. 아마 그런 것은 있을 거 같다.


은영준 : 최소한의 것들을 지켰으면 좋겠다는 마음 정도만 가지고 있는 건가.


류연복 : 나는 그런 것 같다. 나갈 때 마스크 정도 하라면 마스크는 하고. 그리고 우리는 뭐 안 나가도 늘 사니까. 근데 어쨌든 국가가 그것에 대한 관리 능력, 이런 거에 대한 부분들은 잘해 왔지 않나. 아직은 유럽이나 미국 쪽은 더 하는 건데. 그런 생각을 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들은 있더라. 국가가 필요할 때, 국가로서 해야 할 일들은 해야 된다는 생각이 있다. 또, 만약 이전 정부였다면 대처를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은 조금 있다. (전세계적 질병이다 보니 국가와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렵다고 보는 것인가) 질병에 대한 대처방식의 경우에는 특히 그런 거다.


은영준 : 코로나19를 심각하게 느꼈던 때가 있었나. 있었다면 왜 그랬는지 듣고 싶다.


류연복 : 인간의 삶의 방식을 다시 한 번 심사숙고해서 변화의 지점들로 삼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질병 역시 살아온 환경에서 만들어지는 것들이니까. 코로나도 결국 광우병이라든이 AI라든지 조류독감이라든지 이런 것과 같다고 본다. (소위 인재로 보는 것인가) 나는 인재로 본다. 우리가 소나 돼지 같은 경우도 사육시켜 버리지 않나. 그런 곳에서 그런 병들이 생기는 거고. 이때까지 인간의 삶의 방식이 소모적이고 환경 파괴적이고, 제 3세계를 뽑아먹고 하는 행태들이 이런 것들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전세계적으로, 소위 말해 철학적으로, 인간의 삶의 방식이라는 것들을 진짜 한 번 생각하고 변화의 지점들로 삼아내는 계기가 되면 좋겠는데 과연 그럴 수 있을 것인지. 그런 고민들을 하는 사람들이 생길 거다, 내가 보기에.


은영준 :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생활 또는 예술활동을 지속하는 데 제일 도움이 되었던 것은 무엇인가.


류연복 : 내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런데 워낙 그렇게 살아왔던 거라 큰 변화는 잘 모르겠다. 나갈 때 마스크 하는 것밖에는 잘 모르겠더라. 오히려 내 시간을 좀 더 이렇게, 매일 아침에 개 데리고 산에 간다든지, 잘 사용할 수 있어서 더 좋아진 것 같다. 또, 작업을 하든 안 하든 간에 이걸 핑계로 안 가도 될 자리는 안 가도 되니까 좋더라. 그런 거 이외에 다른 건 잘 모르겠다. 주변에 누가 아픈 사람이 있다든지 돌아가신 분이 있다든지 그러면 모르겠다. 이건 직접 당하지 않고는 모르는 것들이니까.



▲ 류연복 인터뷰 워드 크라우드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