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는 역사가 오래된 유서 깊은 마을이다.
그만큼 사람들의 삶이 축적되고 이야기도 넘치던 곳이었으나,
근래에 들어와 급격한 개발로 인해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있다.
이에 우리동네를 시민들에게 알리고 좀 더 기억하게 하기 위해
「우리동네 모충동에 오면…」을 쓰게 되었다.
청주 남주동 쪽에서 개신동으로 가려면 무심천에 놓인 모충교를 건너야 한다.
모충교는 1958년에 완공되어 1985년까지 주민들의 다리 역할을 해오다
모충대교가 새로 놓이며 이제는 인도교로만 사용되고 있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눈앞에 펼쳐지는 동네가 바로 모충동이다.
모충동에서 개신동으로 넘어가는 길을 예전에는 배티라 불렀다.
지금이야 건물과 아파트가 잔뜩 들어차있고 왕복 2차선 도로를
자동차로 씽씽 넘어 다니니 고개란 생각을 할 겨를도 없지만,
두 다리로 걸어 넘나들던 예전에는 그리 만만한 고개가 아니었을 것이다.
배티를 경계로 모충동 쪽에는 곡성 연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어 ‘연배티’라 불렀고, 개신동쪽은 ‘박배티’라 불렀다고 한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배티고개(현 지명은 모충로) 양 옆으로는 퇴락한 집들이 산비탈에 즐비했다.
그보다 더 한참 전에는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고 할 정도로 비가 오면 진창이었다고,
지금도 연세 지긋한 노인들은 우스갯소리를 한다.
그처럼 낙후됐던 지역이 지금은 한창 개발 중이다.
하늘을 찌르며 타워크레인들이 설치되어 무거운 쇳덩이들을 옮기고
육중한 굉음을 매며 덤프트럭들이 쉴 사이 없이 공사장을 드나들고 있다.
모충동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아파트공사가 시작된 까닭이다.
이곳에는 29층 고층아파트에 약 2,000세대가 입주하게 된다.
칙칙하던 70년대 분위기에서 21세기 현대식 건물로 환골탈퇴를 하는 셈이다.
이제 아파트가 들어서면 모충동 지역은 상전벽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운하기도 하다. 편하게 살기위한 인간의 욕구를 막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개선과 발전이라는 명분 아래 이곳에 살던 많은 주민들이
정들었던 고향을 떠나게 된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더구나 역사 이래 수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이 주저리주저리
서려있는 마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여름이 되면 골목길 집 앞마다 들마루가 놓이고
마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무언가를 나눠먹으며
하하호호하던 정겨운 풍경을 이제는 더 이상 이곳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나마도 개발의 틈바귀에서 살아남아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몇몇 유적들과 둘러볼 것이 있어 살펴보려한다.
청주 토박이가 아니더라도 이 지역에서 어느 정도 산 사람이라면,
지명은 물론 위치까지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곳이 모충동 효자문이다.
택시를 타도 효자문을 가자고하면 운전수는 더 물어볼 것도 없다는 듯
달려가는 곳이 모충동 배티고개 초입에 있는 효자문이다.
효자문의 정식 명칭은 ‘연최적충효양전문’이다.
효자문은 남사교 서쪽에서 병무청을 지나 모충동으로 넘어가는 남사로와 모충대교에서
충대병원 방향으로 가는 모충로가 만나는 삼거리 지점 왼쪽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연최적충효양전문’은 연최적의 충과 효를 기리기 위해 임금이 내린 정려문이다.
정려문의 외형을 살펴보면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된 목조기와집으로 북향이다.
정려문 정면 창방 위에는 ‘연공충효양전문(延公忠孝兩全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정려문 내부에는 편액과 효자비가 있다.
정려문 내부에는 편액과 효자비가 있다. 정려문 안으로 출입할 수 있는 문은 없다.
정려문 앞에는 1990년에 후손들이 세운 ‘충신의민공연최적직소비 (忠信毅愍公延最績直疏碑)’가 국한문혼용으로 건립되어 있다.
연최적(1663~1693)은 조선후기 문신으로 청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곡산(谷山)이며 자는 무경(茂卿) 호는 치당(痴堂)이다.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연택로(延宅老)이며 할아버지는 연재희(延再熙)고 증조할아버지는 연응복(延應福)이다.
어머니는 유장(柳莊)의 딸 문화 유 씨(文化柳氏)이다. 부인은 조양(趙暘)의 딸 평양 조 씨이다.
연최적은 1682년(숙종 8) 약관의 나이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에 배속되었고
사헌부 감찰에 올라 4년의 벼슬살이를 하다 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무렵 우암 송시열의 애제자인 한수제
권상하(權尙夏)를 따라 우암의 문인이 되었다.
그 뒤 다시 기용되었으나 1689년 기사환국으로 다시 파직되었다.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원자를 낳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1688년 숙종이 총애하던 소의 장 씨가 아들을 낳자,
숙종은 이듬해 그 아들 균을 원자로 삼고 장씨를 희빈으로 봉했다.
그러자 송시열은 ‘중전의 나이가 아직 한창이고, 두 달 만에 후궁 소생을 원자로 정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반대했다.
우암이 반대를 한 이면에는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閔維重)이 같은 노론이었던 것도 작용했다.
이 일로 인하여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은 관직을 삭탈 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를 당했다가
국문을 받기위해 한양으로 올라오던 중 1689년 정읍에서 사사 당한다.
정계의 많은 노론계 인사들이 파직과 유배를 갔다.
결국 숙종은 중전 민씨를 폐위시키고,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립했다.
그리고 남인계 인사들을 조정에 대거 등용시켰다.
이로써 서인은 집권 10년 만에 남인에게 정권을 빼앗긴다. 이를 기사환국이라 한다.
송시열의 문인이었던 연최적 역시 이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연최적이 옥사를 당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후였다.
1693년 숙종은 구언교(求言敎)를 내린다.
구언교는 나라의 정치가 혼란하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대궐에서 벼슬을 하고 있는 신하들이나 초야에 묻혀있는 유림들에게 해결책을 묻는 교시를 말한다.
이에 연최적은 당시의 정사에 대해 여섯 가지 조목을 들어 임금의 경계를 진달하고
인현왕후 폐위의 부당성과 당시 화를 입은 신하들의 복권을 위해 장문의 상소문을 올린다.
이 상소문이 조정에 전해지자 숙종은 진노하여 아래와 같이 교시를 내린다.
“……전 감찰(監察) 연최적(延最績)이 감히 금영(禁令)을 인식하지 않고
앞장서서 소(疏)를 올리고 지금까지 없었던 일을 새로 생각해 내는 것이 흉악하고 참혹하며
사연을 만드는 것이 음험하여 한 글자 한 귀절도 화(禍)를 전가시키거나,
해치고 어지럽히는 수단이 아닌 것이 없으니,
이미 극도로 마음이 아픈데 그 가운데 육례(六禮)로서 가다듬는다는 등의 말은
더욱 아주 사리에 어긋나 신하로서는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것이 있으며,
영소전(永昭殿)을 이안(移安)할 때 나아가 참여한 여러 신하가 매우 적었다고 하는 데
이르러서는 마음씀이 참혹하고 악독하기가 뱀과 살모사보다 심하니,
그 정상을 논하면 대단히 가슴 아프고 한탄스럽다.
이와 같은 난적(亂賊)은 전형(典刑)을 분명하게 바로잡아 악한 일을 엄중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번의 비망기(備忘記)에 의거하여 즉시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엄중하게 실정을 캐내고 신문하도록 하라”
-숙종실록 25권-
어전에서는 국청이 열리고 연최적은 일곱 차례의 심한 국문을 당한 끝에 옥사한다.
연최적의 상소문은 당시의 정세를 명확하게 꿰뚫고 있어 사관은 실록에 기록하였으며,
현재 『조선왕조실록』에 전문이 전해지고 있다.
연최적이 관작을 추증 받은 것은 그가 국문으로 옥사한 다음 해였다.
1694년(숙종 20) 폐위되었던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이어 순무사가 효자로 소문이 자자한 연최적의 효행을 조정에 알려 동네에 효자문이 먼저 세워졌다.
숙종실록 25권 숙종 19년 8월 6일에는 ‘연최적은 본관이 청주(淸州)이며,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를 다하였다.
당시의 일이 날로 그릇되는 것을 보고 분격함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여 드디어 이 소(疏)를 올렸는데,
논한 바가 모두 세상에서 꺼려하는 것이었으며, 여섯 가지 예(禮)와 관어(貫魚) 등에 관한 일은
또한 윤리[倫常]의 소중함을 잘 돌아다 본 것이기는 하지만 임금의
위엄있는 노여움에 저촉되었고,
또 흉당(凶黨)의 부추김을 당하여 극심한 형신(刑訊)을 받다가 죽었으므로 세상에서 모두 슬프게 여겼었다.
그러다가 갑술년에 이르러 맨 먼저 포창(褒彰)하여 관작을 추증(追贈)하고 잇달아 효도를 정려(旌閭)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1738년(영조 14)에는 모든 것이 복위되고 자손까지 녹용하라는 어명이 내려졌고,
1747년 이조판서 겸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에 추증되었으며,
1748년에는 충효양전문(忠孝兩全門)이 건립되었다.
1779년(정조 3)에는 기사환국 당시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 두 신하의 죽음을 힘껏 구제하고 모진 형문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충절이 인정되어 특별히 임금으로부터 의민(毅愍)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연최적충효양전문’을 우리동네 모충동에서는 효자문으로 부른다.
청주 지역은 물론 우리나라 전국 곳곳에는 수많은 효자각과 충신문이 있다.
그러나 충신문과 효자문이 함께 있는 것은, 더구나 한 사람이 두 정려를 받은 것은 그리 흔하지 않은 일이다.
‘연최적충효양전문’의 주인공인 연최적은 300여 전의 인물이고, 당시와의 시대적 상황이 달라졌다 해도
부모를 섬기는 ‘효’와 나라를 생각하는 ‘충’ 정신은 만세가 흐른다 해도 변하지 않을 만고불변의 인간 도리일 것이다.
수백 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도 연최적의 행적과 함께 효자문이 우리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까닭이다.
지금도 모충동 일대에서는 효자문이란 명칭을 따온 상점과 건물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현대에 이르러 점점 희미해져가는 효와 충의 정신을 배우는 장소로
연최적의 효자문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효자문에서 개신동 쪽으로 모충로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사직 사거리로 가는 호국로가 나온다.
사실 호국로라는 새로운 지명보다는 국보제약 골목으로 더 잘 알려진 길이다. 길모퉁이에 후생사가 있다.
후생사에서 신호등을 건너 충북대학 쪽으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도로와 연하여
오른쪽으로 철망을 둘러친 언덕이 보이고 가파른 계단이 나온다. 이곳이 모충사다.
모충사는 2015년 4월 17일 청주시 향토유적 제75호로 지정되었다.
모충사는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전쟁 때 전몰한 충청병영의 병사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동학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라도 동학과 전봉준을 떠올린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의 효시가 충북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동학농민전쟁이 벌어지기 일 년 전인 1893년 봄,
이미 보은군 외속리면
장안마을에 7만여 명의 동학교도들이 모여
교조신원운동을 벌이며 대도소(大都所: 총본부)를 설치하고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양척왜(斥洋斥倭)를 외쳤었다.
한말 조선은 밀려드는 외래품 범람으로 농업경제 파탄,
조정의 개혁 실패로 인한 물가 앙등,
양반·지주들의 수탈로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진다.
1894년 1월 10일, 갑오년 벽두부터 전라도 고부에서는
조병갑의 탐학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전봉준을 중심으로 항쟁을 벌인다.
그러나 관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진압되고 만다.
그러나 전봉준은 조정의 근본적인 폐정을 뿌리 뽑기 위해서는
동학을 매개로 전국적인
무력투쟁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전라도와 충청도 동학 지도자들에게 통문을 보내 봉기할 것을 촉구한다.
그리고 무장에서 호남창의소 명의로 포고문을 발표한다.
동학농민들은 보국안민을 기치로 내세우며
탐관오리에 대한 징계와 낡은 정치를 쇄신할 것을 조정에 요구하며
전라도 지역을 파죽지세로 점령해나갔다.
충북에서도 황간, 영동, 보은, 옥천 등지에서 동학도들이 봉기하여 양반, 지주들을 징치하고 그들의 집을 불태웠다.
충주에서도 동학도들이 관리들을 살해하고, 악행을 한 양반사대부들을 잡아다 혼을 냈다.
충북의 동학도들도 봉기하여 상당한 지역을 점령한 상태였다.
청산 문바위골에 머물며 사태를 관망하던 최시형도 입장을 바꿔 동학도들에게 청산으로 모두 집결하라는 통문을 띄운다.
이에 따라 동학도들이 청산으로 집결하기 시작했고, 강원도, 경상도 동학도들까지 충북으로 들어와 합세하고 있었다.
충청병사는 청주성 밖 가까운 곳에 삼천 명의 동학도들이 운집해있으며 시간이 갈수록 그 수가 늘어나고 있다고 보고했다.
조정에서는 홍계훈을 양호초토사에 임명하고 동학도들 토벌을 명한다.
충청도 동학은 당초 전라도 동학 농민군과 합세해 총공세를 펴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청산에서 비밀문서를 가지고 무장으로 가던 동학도가 관군에게 체포되어 사전에 발각되고 만다.
충청감영에서는 관군을 파견하여 논산, 진잠, 금산, 옥천 등
충청도와 전라도로 통하는 길목을 철저하게 막으며 이 지역 동학도들을 체포하고 살상한다.
충청도 상황이 악화되자 최시형은 사태를 관망하며 동학도들의 봉기를 만류한다.
그러나 동학 내 강경파들은 전라도로 내려가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에 합류하였다.
보은, 충주, 청풍 등지의 동학도들이었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장성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최정예 관군을 격파한다.
이 여세를 몰아 전주성까지 점령한다.
충청도 동학군들도 옥천, 회덕, 진잠, 문의, 청산, 보은, 목천 지역을 점거하며 봉기하고 있었다.
전봉준은 청주에서 동학농민군들을 규합하고 있던 서장옥과 힘을 합해 한양을 공격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와 동시에 최시형을 설득하여 항일전쟁을 위한 연합전선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최시형은 청산에서 대접주들을 소집해 ‘도인들을 동원해 전봉준과 협력하고
교조의 원한을 풀며 우리 도의 큰 바램을 실현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리고 일반 동학도들에게도 총동원령을 내린다. 최시형은 보은 장내리에 대도소를 설치한
후 손병희에게 통솔을 명한다.
그리고 전라도 동학농민군들과 함께 한양으로 올라가 일본군을 몰아내기로 결정한다.
한양으로 진군하기 위해서는 공주의 충청감영과 청주의 청주병영, 충주 가흥의 일본군 병참부를 점령하지 않으면
역습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장옥과 손천민이 이끄는 1만 명의 동학농민군들은 먼저 청주를 쳤다.
그러나 청주 동학군은 우월한 병력수에도 불구하고 신식무기와 정예병으로 조직된 관군의 반격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그래도 동학농민군은 청주성을 둘러싸고 닷 세 동안이나 공세를 취할 만큼 강력했다.
이때 청주성을 지키고 있던 관군은 진남병들이었다.
청주성에서 밀려난 동학농민군들은 해산하지 않고 신송리 · 세교리 · 미원 · 청산에 집결하여 재공격을 준비하였다.
이와 같은 절박한 상황에서 회덕·유성 지역에 집결한 동학군이 세력을 떨치자
충청감사 박제순은 충청병영의 진남병을 보내 이들을 해산시킬 것을 명한다.
명을 받은 충청병영의 영관(領官) 염도희(廉道希)가 교장(敎長) 박춘빈(朴春彬)과
대관(隊官) 이종구(李鍾九)와 병사 80명을 이끌고 연산과 진잠 일대를 순찰하던 중
공주목 관내의 대전평에서 1만 여명이나 되는 대규모 동학농민군과 맞닥뜨렸다.
중과부적의 상태에서 염도희 이하 73명의 병사들은 대항조차 하지 못하고 몰살을 당한다.
당시의 상황은 청주병사 이장회의 보고서에 이렇게 나타나 있다.
충청병영의 병정 100명이 오랫동안 순영에 있으면서 순찰사 박제순의 지휘에 따라
10월 3일 우영관 염도희, 대관 이종구 등이 병정 80명을 이끌고 효유하기 위해
행군하여 공주의 대전평(大田平)에 도착했습니다.
적당이 대도회를 여는 곳에 가서 나라의 명령을 널리 알리려 할 때
수만 명의 그들 무리들이 사방으로 에워싸서 총을 쏘고 무기를 빼앗으려 하면서
영관과 대관이 가진 환도를 바칠 것을 요구해서 도리를 내세워 꾸짖었으나 상황을 면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자신의 목을 칼로 찔렀으며, 그 나머지 교장 이하 여러 병정 80명은 모두 도륙되었습니다.
이날 죽은 청주병영 진남병은 모두 73명이었다.
이 일은 동학농민전쟁 당시 관군이 입은 가장 큰 피해였다.
이들 관군의 영령을 봉안한 사당이 모충사이다.
이들 장졸들의 순절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1894년 11월 전임목사 임택호(任澤鎬)가 남석교 밖에 제단을 마련하고 합동위령제를 지냈고,
1903년에는 안종환(安宗煥)의 계품에 따라 전몰 장교들에 대한 증직이 이루어졌으며, 당산(唐山)에 모충단을 세웠다.
1905년에는 진위대 병사들이 갹출하여 갑오전망장졸비와 비각을 세웠다.
1907년 군대해산 이후 모충단의 제향전답문권(祭享田畓文券)이 상실되자
곽치중(郭致中)·김순택(金順澤) 등이 문권(文券)을 찾고, 모충계를 조직하였다.
1914년 곽치중·김순택·윤영성(尹永成) 등의 모충계가 주축이 되어 당산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일제가 당산을 신사터로 삼자, 1923년 모충동 고당마을(현 서원대 운동장 부근)로 사당을 옮기게 되었다.
그러다 1970년 고당 일대가 학교시설 부지로 편입되자, 1975년 운호학원에 매각하고 현재의 위치인 서원구 모충로 85(모충동 산 13-6)로 다시 옮겼다.
모충사 경내에는 당시 충청병마절도사였던 홍재희(洪在羲; 홍계훈)의 치적을 기리기 위한 선정비와 갑오전망장졸기념비가 아래위로 서있으며,
제일 높은 곳에 단층목조기와집으로 된 모충사가 있다.
사당 안에는 중앙에 진남영 영관 염도희, 대관 이종구, 교장 박춘빈의 위패와 왼쪽에 병사들의 위패가 있다.
현재 모충사는 청주모충회에서 관리를 맡고 있으며, 10월 3일을 향사일로 삼고 있다.
이외에도 우리 동네에는 주민들이 즐겨 찾는 매봉산이 있다.
산이라고 하지만 100M도 되지 않는 야트막한 동네 뒷산으로 종일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숲길을 걸으며 바쁜 일상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쉬기도 한다.
이곳 매봉산 동쪽 등산로 입구 절터 보호각 안에 돌부처 한 구가 봉안되어있다.
이제는 아파트와 건물들에 둘러싸여 처음 오는 사람들은 모충로에서 매봉산을 찾아들기도 힘들 지경이 되었다.
매봉산으로 가는 길은 모충로 큰길에서 모충초등학교로 해서 가는 길과
효자문에서 가는 길, 모충사에서 우리마트로 해서 가는 길 등등 수없이 많다.
길눈이 밝은 사람은 아직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모충동 옛 집들 사이사이로
미로처럼 얽혀있는 골목들을 구경하며 가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모충동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청화사(淸華寺)가 있던 절터에 있다.
청화사는 1940년에 창건된 태고종 사찰이었는데 2002년 화재로 법당과 요사체가 모두 소실되었다.
따라서 현재 불상은 노천의 보호각 안에 봉안되어 있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의 전체 높이는 121㎝, 불상 높이는 74㎝로 광배와 대좌가 하나의 돌로 되어있다.
머리에는 특이한 삼면보관을 썼고 그 위로 보발이 보이고 얼굴은 갸름하며,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고 수인은 왼손으로 오른손 둘째 손가락을 쥐고 있는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두광에는 연판문이 부조되었고 그 바깥으로는 화염문이 있다.
전체적으로 조각수법이 우수하고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불상은 앙련 대좌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있는데, 다리 앞부분이 파손되어 형태를 알 수 없다.
하대석과 중대석은 결실되었다.
모충동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고려시대 불상으로 추정되며, 2010년 7월 23일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16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불상에 쓰인 석재, 뒷면 처리수법, 조각 수법이나 형태의 특징을 볼 때 근대에 조성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이 불상은 일제강점기에 대성동 당사에 있던 신사 터로 옮겨졌다가
해방 후 지금의 청화사지로 이전 봉안되었다고 하나 전하는 기록이 없어 본래의 위치와 내력은 알 수 없다.
현재 이 불상의 주변에는 옛 청화사 절터와 오층석탑, 동종, 삼성각이 남아있다.
우리동네 모충동에 오면 효자문이라고 부르는 ‘연최적충효양전문’과 한말 우리의 아픈 역사를 품고 있는 ‘모충사’,
그리고 매봉산으로 가는 길 입구 옛 청화사 터에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있다.
역사는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공존하며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과거를 되돌아보며 미래로 가는 길을 가늠한다.
연최적의 삶의 족적을 보며 그러하고, 동학전쟁으로 희생당한 농민군과 관군의 삶을 보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할지를 생각한다.
복잡다단한 도심을 벗어나 모충교를 건너 옛 배티마을인 모충동으로 오면 역사와 숲길을 걸으며 사색에 빠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