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화된 코로나 생활로 생긴 우울한 마음을 달래며
무심천과 한 개인의 관계를 주목한 기행문
오늘은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 불안한 취업환경 속 연기된 공채와 자격증,
바뀌어버린 밤낮으로 몸은 아파오고 머릿속은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콜록콜록 기침소리에 혹시 감염된 것은 아닌지 답답한 생활은 언제까지 해야 되나 하염없이 생각만 하다 시계를 보니 자정,
오늘은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어 무심천으로 향합니다.
‘한국민족대백과’에 따르면 무심천은 낭성면의 북사면에 위치한 추정리 부근에서 발원하여
청주시 흥덕구 원평동과 상당구 오근장동의 경계에서 미호천으로 흘러드는 하천이라고 합니다.
무심천의 유래를 살펴보면 고려시대에 심천(沁川)이라고 불리었고,
이것이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석교천(石橋川)·대교천(大橋川)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되며,
1923년 이후부터 무심천으로 불리웠다고 합니다.
무심천의 전체길이는 34.5㎞, 월운천(7.0㎞), 미평천(6.0㎞), 영운천(4.0㎞), 명암천(4.5㎞) 및 율량천(4.5㎞)의 5개 지천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집 앞에 있는 영운천 근처로 향할까 합니다.
무심천의 낮은 시끌벅적 활기차고 생동감이 넘쳐 역동적이라면
무심천의 밤은 고요하고 적적해 가만히 앉아 물 흘러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고즈넉한 분위기에 취해 무심천 다리 위, 방서교에서 멈춰 서 흘러 내려가는 시냇물을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이 풍경 어디선가 익숙합니다. 분평동에서 처음 알바를 구한 날부터 두 번째 알바까지 늘 이 다리를 건너며 보았던 풍경입니다.
열일곱이란 나이에 학업을 병행하면서 처음 일을 배우고 사람을 사귀고 돈을 모았습니다.
사장님께 인정받아 칭찬도 받고 고된 가게 일을 마친 후 다시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정말 바쁜 삶을 살았습니다.
그땐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다시 그때처럼 살라고 하면 살 수 있을지 옛날 생각이 문뜩문뜩 떠오릅니다.
그 당시의 풍경이 지금 제 눈앞에 담겨 있습니다.
치열하게 살았던 제 모습이 눈앞에 아른아른 거립니다.
거센 바람처럼 울컥 올라오는 향수에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고 마스크를 잠시 내렸습니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습니다. 이따금 들어오는 찬 공기에 정신이 아찔, 눈물이 핑.
조금이라도 과거의 저와 교감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시원하게 폐를 관통하는 차가움은 칼바람보다도 아팠습니다.
과거의 제가 내뱉었던 숨을 오늘이 되고서야 들이마시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그때, 전 무엇을 위해 그렇게 살았을까요.
이제 다리 밑으로 내려갑니다. 신호등 옆 운동기구들 사이에 있는 돌계단으로 내려갑니다.
저 멀리 러닝을 하는 사람이 보입니다. 늦은 밤인데도 열심히 땀을 흘리며 뛰고 있습니다.
두 귀에는 이어폰을 꽂은 채 머리는 꼿꼿이 서서 뛰고 있습니다.
러닝하는 사람이 가까워지자 저를 본 듯 서둘러 마스크를 썼고 저도 거리를 둔 채 그 사람을 지나쳤습니다.
저 사람은 무엇을 위해 늦은 시간에도 운동을 하는 것일까요. 궁금했습니다.
저 사람과 저는 같은 시간의 축 위에 서있지만 사용하는 방향은 전혀 달랐습니다.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저를 반성하게 만들었습니다.
무심천을 걸으면서 어릴 적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와 동생과 함께 자전거를 타며 주말을 보내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얼음물 대신 늘 미지근한 물을 드셨고
동생과 저는 아그작 아그작 얼음을 씹어
먹으며 용암동부터 롤로스케이트장까지 달렸습니다.
가는 길목에 다리 밑에서 자전거 바퀴에 바람도 넣고 그 앞에서 홀딱 젖으며 물놀이도 했었습니다.
한 때 우리 가족의 수영장은 무심천의 민물이었습니다.
매 주말 마다 아버지와 함께 자전거 타고 무심천을 한 바퀴 돌며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하는 무심천 자전거 여행은 제가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자연스레 줄어들었고
고등학생이 되자 아예 하지 않았습니다.
학원이니 대입이니 수능을 운운거리면서 삐딱하게 튕겼었는데 그땐 참 왜 그랬는지.
아버지와 자전거를 한 번 더 타보지 못한 게 지금에서야 후회가 됩니다.
세월이 야속합니다.
한참을 더 가다보니 갈림길이 나왔습니다.
오늘은 평소에 가던 길 말고 처음 보는 길, 어디가 되었던지 익숙하지 않은 길을 가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돌다리를 건넜고 그 속에서 민물의 흙냄새를 물씬 맡았습니다.
흙냄새를 맡으니 돌다리 옆으로 학처럼 보이는 새 한마리가 고고히 서있던 때가 생각납니다.
무심천에서 천연기념물인 수달이 나온다는 팻말은 보았어도
실제로 가까이서 동물을 본 건 처음인지라 굉장히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그 새의 자태는 급히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찍는 것이 무례할 만큼이나 지조 있었습니다.
새를 보면서 운치를 감상할 수 있다니 처음 겪는 일일뿐더러 신기했기에 기억에 남았습니다.
무심천에도 다양한 생물들이 함께 공존하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한국민족대백과’에 검색해보니 무심천과 그 인접 하천은 짧은 지전으로서
수위 변동이 심하기 때문에 수생식물의 서식이 빈약하고,
홍수에 의한 매몰이나 유출이 일어나서 불안정한 성격의 식생이 분포한다고 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군자처럼 홀로 고고히 서있는 새를 볼 수 있었다니 운이 좋았습니다.
이번에 걷는 길은 신축 아파트 단지 사이에 끼어 환상적인 그림을 자아내는 길이었습니다.
양 옆으로 꽃밭이 있었고 작은 폭으로 그 가운데 길이, 또 오른쪽으로는 돌다리가 있었습니다.
아까와는 다르게 길이 좋은 벽돌로 만들어 졌고 오랜 시간이 지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신호등 앞, 뚝 끊겨버린 길에 흐름이 무너져 약간의 허망감을 느꼈습니다.
주유소의 불빛이 시선을 가져갔고 6차선 도로에 단지 몇 대만이 쌩쌩 달리는 것을 보며 생각이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온통 난리 통이었던 작년을 시작으로 대규모 방역이 시작되고 꼼짝없이 집에만 박혀있게
되었습니다.
길가에서 쿨럭이던 사람을 예민하게 대해야 했고 백신이 나올 때까지 모든 게 멈추었습니다.
모든 게 연기되고 금지되고 불안했습니다.
학교는 제대로 다닐 수 있는지 취업은 어떻게 변화하는지 모든 게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불안함을 떨치고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기 위해 무심천으로 새벽여행을
나왔습니다.
늘 가던 길이 아닌 처음 보는 길로 마음이 향하는 대로 떠났습니다.
가만 보면 무심천도 우리도 모두 코로나에 적응하고 있었습니다.
매년 하던 벚꽃 놀이도 랜선벚꽃놀이로 바뀌었고
오늘처럼 우울한 일상을 이겨내기 위해 한적한 시간대에 무심천에서 산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 저는, 무심천이 삶의 이유라도 주는 듯 저를 이끌어가고 있었음을 느꼈습니다.
신호등을 건너자 물소리가 잘 들리는 터를 발견했고 다시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신기하게 생긴 전봇대를 보았습니다.
저는 흐뭇했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무심천과 지내오니 무심천도 이제 저를 잘 아는 듯
힘들 땐 물소리도 들어보고 강가를 걸으며 인생을 잠깐 쉴 수 있게 마련해주었습니다.
거기에 소나무 행세하는 전봇대라니 너무 재밌었습니다.
그제야 저는 무심천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심천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돌봐주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무심천은 아낌없이 주는 강이었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와 자전거 여행을 할 수 있게 자전거 도로와 물놀이를 할 수 있게 물을 내주었습니다.
봄에는 벚꽃을 겨울에는 빙판을 주었고 우울함을 달래기 위한 산책로이자 건강을 챙기던 운동로이기도 했습니다.
학생땐 고됨을 달래기 위한 풍경을 주었고 지금은 모험을 떠날 수 있는 모험 길을 주었습니다.
그 속에서 자연의 소리와 자연의 모습과 자연의 냄새를 주면서 마지막으로 웃음까지 주었습니다.
이번 여행은 분평동과 용암동 사이에서 시작하여 방서동을 지나 동남지구까지 쭉 한 바퀴를 돈 새벽여행이었습니다.
덕분에 우울한 마음도 정리하고 옛 추억을 회상하며 기분 좋게 다시 잠자리에 들 수 있었습니다.
무심천에게 너무나도 고맙고 새벽여행 속 느꼈던 제 감정을 다른 분들 또한 무심천을 거닐며 느껴보시길 소망합니다.